문화 · 스포츠 문화

"남이 한 건 절대 안 해"…원로작가 이승택, 인생도 미술도 거꾸로

전통의 고드랫 돌 묶었던 자국

팽팽함 통해 '억압극복' 드러내

바람·불·땅 자연 소재로 작업

"손에 안잡히는 작품" 비판 뚫고

'비미술·비조각' 역발상에 주목

이승택은 고드랫돌과 옹기 등을 소재로 '우리 것'을 찾으려 애썼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이승택은 고드랫돌과 옹기 등을 소재로 '우리 것'을 찾으려 애썼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고, 거꾸로 생각하며, 거꾸로 살았습니다. 나는 남이 한 것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려지지 않은 그림, 조각되지 않은 조각의 작가 이승택(90)이 평생 지켜온 신념이다. 바람을 새기고, 불을 빚으며, 땅을 그리려 한 그를 주류 미술계는 애써 외면하곤 했다. 그럼에도 뚝심은 통했고, ‘비미술’ ‘비조각’의 역발상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동력이 궁금해 찾아간 마포구 연남동 자택. 왕성한 탐구력을 보여주듯 수북한 책더미 속에서 두툼하지만 낯선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1976년 열화당에서 출간한 ‘세계여체조각’. 구석기 시대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시작으로 여성의 몸을 주제로 유럽과 미국, 일본과 한국에서 제작된 조각들이 빼곡히 담겼다. 도판 하나하나를 이승택이 직접 편집해 엮은 서적이다. 518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의 말미, 현대조각사 부분에는 노끈으로 여체를 묶은 그의 ‘매어진 여체’도 등장한다. 책에 대해 이 작가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었고 시도된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라며 “‘거꾸로’가 결국은 ‘정반합’의 철학과 같은 맥락이며,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설을 통해 일치돼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함경도 고원이 고향인 이승택은 정교한 묘사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흙으로 빚은 내 얼굴 데드마스크를 본 교장선생이 혀를 내두르더니 자신의 책상 뒤에 가져다 놓았던” 실력의 소유자였고, 해방 후 중학생 때는 군 인민위원회 의뢰로 김일성 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 덕에 인민군 징집을 면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월남할 수 있었으니 타고난 재주가 목숨을 구한 셈이다.

이승택 /사진제공=갤러리현대이승택 /사진제공=갤러리현대


홍익대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거꾸로’ 인생이 시작됐다. “대학 1학년 때, 남들은 하얀 종이를 까맣게 채워가며 데생하는데 나는 까만 종이에 흰 백묵으로 비너스상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의 개념도 통용되지 않던 시절이라 ‘표현과 정서가 없는 이런 건 그림도 아니다’라는 선생님의 핀잔을 들었죠.”

2학년 때는 받침대 하나에 두 개의 조각상을 올려 국전(國展)에 출품했다. 유사 이래 ‘1좌대 1작품’의 불문율을 의도적으로 깬 작가는 어쩌면 그가 처음이었으리라. 심사위원의 궤변을 귀따갑게 들었던 그는 실험적으로 택한 재료들을 ‘좌대 없이’ 바닥에 놓거나, 탑처럼 위로 쌓아올렸다. 제멋대로 천장에 매달기도 했다. 이승택 식 ‘비조각(非彫刻)’이다.

이승택의 '고드랫돌' /사진제공=갤러리현대이승택의 '고드랫돌' /사진제공=갤러리현대



그런 20대 이승택의 관심은 ‘우리 것’이었다. 스케치를 위해 처음 간 덕수궁 석조전에서 옛 사람들이 발이나 돗자리를 엮을 때 사용하던 민속품인 ‘고드랫돌’을 발견했다.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오는 17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 ‘(언)바운드(’(Un)Bound)’를 채운 작업들의 시작이다. 고드랫돌의 묶은 자국은 딱딱한 돌을 물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묶기라는 행위는 재료의 물성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며 생명력에 대한 환영을 불러오는 효과로 연결돼 이 작업과정에 몰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돌,백자,사람까지도 묶었다. 묶은 자국의 팽팽함은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동시에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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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인 이승택의 개인전 '(언)바운드' 전경. /조상인기자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인 이승택의 개인전 '(언)바운드' 전경. /조상인기자


산업화의 상징인 철판 조각이 유행이던 시절, 골조 앙상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본 후 “뼈마저 부정하면 남는 것은 형체 없는 작품 아닌가”를 생각에 빠졌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머리 식히러 들른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보여준 홍보뉴스에 시선이 꽂혔다. “중동 정유공장 굴뚝에서 연기 피어나는 모습은 그 시절 부흥의 상징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내 작품’을 찾았지요.” 연기와 바람, 불과 땅이 그의 작품이 됐다.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을 그가 해냈다.

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인 이승택의 개인전 '(언)바운드' 전경. /조상인기자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인 이승택의 개인전 '(언)바운드' 전경. /조상인기자


기발했고 남달랐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금지’ 당하기 일쑤였고, 동료들의 질시를 받았으며, 팔리기 만무했다. 생활비는 다른 데서 벌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교수가 수주받은 동상 제작에 ‘동원’됐다. 김경승의 작품으로 알려진 인천 맥아더 장군 동상도 실은 이승택이 숨은 창작자다. 이승택은 서울경제와 한국일보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 흉상을 비롯한 76점의 동상을 제작했다. 엄청난 수량이다. 작가는 “동상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고 그 덕에 내가 하고 싶은, 나의 예술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택의 '무제' /사진제공=갤러리현대이승택의 '무제'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지난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의 제1회 국제예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되면서 이승택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큰 큐레이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세계 미술사를 다시 쓸 작가”라며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며 찾아 왔다. 이후 런던 프리즈마스터즈를 통해 유럽에 선보인 후 파란을 일으켰다. 뉴욕 레비고비, 런던 화이트큐브 등 유수의 갤러리가 그의 개인전을 열었고, 시드니현대미술관·런던 테이트 모던·구겐하임 아부다비·홍콩 M+ 등이 작품을 소장했다.

“남들은 서양의, 주류 미술사조에 편승하기 위해 주력했지만 나는 일부러 거부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나만의 길을 갑니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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