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기업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기업이 임금을 과하게 올리면 가뜩이나 오른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고 중소기업과의 격차도 벌어져 사회 갈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노동계는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규제를 풀어서 기업만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물가가 올랐으니 임금 인상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현재 경제 여건에서는 소위 영국병으로 알려진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wage price spiral)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기업 노조의 임금 인상은 고통 분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도 우리 경제에 심각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지금 물가 상승의 배경에는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린 탓도 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심화된 코스트푸시 인플레이션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농산물을 비롯한 원자재와 석유·가스 등 에너지 공급이 부족해짐에 따라 그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원자재와 에너지 부족은 소비재 생산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물가가 상승하고 실질소득이 감소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즉, 물가 상승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시장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이 고통 분담이다. 시장 원리에 의하면 실질임금과 이윤이 모두 하락하기 때문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경제 구성원들이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 반면 누군가가 임금을 인위적으로 인상해 실질임금을 유지하면 그들은 고통 분담에서 면제되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 고통까지 떠안게 된다. 포퓰리스트는 그 누군가가 ‘자본가’라고 선동하겠지만 현실에서의 정답은 안타깝게도 나머지 근로자들이다.
일부 대기업은 물가 상승률만큼 임금을 올려 줄 여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에 인건비 인상까지 감당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많지 않다. 경기 침체에 따른 생산 위축으로 하청 물량이 감소하는데 대기업에서 임금까지 인상되면 하청 물량은 더 줄어 중소 하청 업체 근로자들에게 전가되는 고통은 더 커진다. 아울러 신규 채용도 감소하므로 청년층의 고통도 배가된다. 경제부총리가 우려했듯이 대기업 근로자들이 분담할 고통의 몫이 중소기업 근로자, 청년 구직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모든 근로자의 임금을 일률적으로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러면 많은 한계 기업들이 파산해 실직이 증가하고 일자리가 사라질 뿐이다. 고통이 취약 계층에 전가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임금이 올라도 소위 ‘자본가’ 계급에 돌아갈 이윤이 감소할 뿐이라는 19세기 계급투쟁론은 21세기 시장경제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은 근로자가 대부분의 자본을 제공하고 있어 그 피해도 근로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본가에 해당하는 현재 개념은 주주이며 그중에는 재벌 총수도 몇 있겠지만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와 개미 투자자인 서민과 근로자들이 대부분이다. 국민연금의 손실도 결국 근로자의 손실이며 연금이 줄어들면 저소득층이 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경제는 침체기를 겪게 마련이며 1998년 경제 위기 때와 같이 모든 경제 주체가 자발적으로 고통 분담에 동참할 때 위기 극복도 쉬워진다. 반면 일부 집단이 자신들의 소득만을 안정된 수준에서 유지하려 한다면 나머지가 떠안게 될 고통의 몫은 그만큼 커지고 경기회복도 더딜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 5% 인상에 대해 노사가 모두 불만이지만 달리 보면 소상공인들과 최저임금 근로자들도 모두 고통 분담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대기업 근로자들의 평균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세 배 이상 높다. 이들에게서 최소한 최저임금 근로자들보다는 더 많은 고통을 분담하겠다고 자처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해 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