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가장 좋은 것만 골라 너에게 주고픈 마음

가족·질병·시험…온갖 책임에 눌려

원하는 걸 가져본 적 없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골라주고 싶은 마음

그 찬란한 사랑이 삶을 버티게 해







글쓰기란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 어떤 장치도 없이 오직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우리를 저 높은 알프스 꼭대기는 물론 저 깊은 태평양의 심해까지 데리고 가니까요. 글쓰기란 참으로 신통해서, 어제 느낀 아픔을 오늘 글자 한 자 한 자 속에 녹이면 더 이상 어제처럼 아프지는 않게 됩니다. 때로는 강력한 진통제처럼, 때로는 달콤한 초콜릿처럼, 고통을 잊게 해주는 글쓰기가 나를 견디게 했습니다. 팬데믹의 기나긴 터널 속에서,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하여 보송보송한 스웨터를 만들 듯 그렇게 천천히 쓰고 또 썼습니다. 한여름에도 거리두기로 인해 마음은 더욱 추웠던 우리에게, 그 가혹한 마음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영혼의 스웨터를 떠주고 싶었습니다. 내 글을 읽으며 갑갑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견디는 독자들이 나를 버티게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모르더라도 오직 글쓰기만으로 서로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가닿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픈 시간들을 견뎌온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아픈 시간은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은 저 멀리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함께 가장 따스한 시간을 만나러 떠나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러 떠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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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우리 아직은 괜찮다고 느끼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 어떤 고통과 두려움이 마음을 할퀴어도, 너만 있으면 괜찮다고 느꼈던 순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애써 명랑한 척하지만 사실은 극도로 내성적인 제가 말로는 털어놓기 어렵지만 글로는 쓸 수 있는 삶의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가눌 수 없는 슬픔이 매일 나를 공격해도, 내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 보이지 않는 화살이 되어 나의 심장을 찔러도, 나는 아직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저를 견디게 합니다.

팬데믹 이후, 제가 매일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가. 무슨 힘으로 이 기나긴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가. 생각해 보니, 내가 가진 가장 밝고 찬란하고 해맑은 사랑의 힘으로, 나는 버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밥이 먹고 싶다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친정에 들이닥친 딸내미가 그냥 아무렇게나 냉장고에 남은 반찬과 찬밥을 먹겠다는데, 기어코 쌀을 씻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을 지어내고 오래 아껴둔 굴비를 노릇노릇 구워내고 아삭하게 잘 익은 김치만을 세심하게 골라 한 보시기 썰어내는 엄마의 마음으로. 이 세상 떠나는 마지막 날, 내 곁의 소중한 이에게 꼭 남기고 싶은, 우리가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과 우리의 빛나는 추억이 빼곡하게 담긴 유품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가장 좋은 것만을 소중한 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쁜 소식이 너무 많이 들려와 걸핏하면 침울해지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끝내 우리를 환하게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들이 더 많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가슴에 먹구름을 끼게 하는 뉴스들에 지친 당신의 어깨 위에, 우리가 정성들여 빚고 깎고 다듬은 소중한 이야기가 지닌 따스한 환대의 에너지가 부디 가닿기를 바랍니다.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온전히 몽땅 가져본 적 없는 당신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단칼에, ‘난 당신을 원해요’라고 말한 적 없는 당신에게. 한 번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난 이 꿈을 이룰 거야’라고 말해본 적 없는 당신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빛을 애써 숨겨야 하는 시간은 끝났다고. 이제 당신이 지닌 최고의 빛을 공작새처럼 활짝 펼쳐낼 시간이라고. 힘겹게 취직시험을 준비하느라, 온갖 임무를 수행해내느라, 가족 때문에, 질병 때문에, 그 모든 외적인 장애물 때문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당신에게. 내 안에서 들려오는 가장 어여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당신에게 주고픈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제가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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