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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헌트' 이정재 감독, 공포감 이겨낸 끝에 얻은 박수

'헌트' 이정재 감독 /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헌트' 이정재 감독 /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게 힘들다고 했던가. 배우 이정재는 한 번에 서너 개의 도전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배우 명성에 금 가지 않는 연출, 제작, 연기 그리고 23년 만에 한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절친 정우성과의 호흡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지만 깊은 고뇌와 집념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영화 ‘헌트’의 여정은 이제 관객들의 평만 남았다.



‘헌트’는 데뷔 30년 차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다.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는 이야기로, 두 배우의 첩보 액션과 팽팽한 신경전이 감상 포인트다.

작품의 초기 제목은 ‘남산’으로 이정재는 당초 연출이 아닌 제작을 하고 싶어 판권을 구매했다. 주제의 방향성을 수정하고 싶었던 그는 호흡을 맞출 감독들을 찾아 나섰고, 계속 불발되면서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됐다. 그렇게 지금의 ‘헌트’가 됐다.

“초고에서 주제가 바뀌면서 인물 구성과 관계도가 제일 많이 바뀌었어요. 원래 박평호 원톱 주인공이었고, 박평호가 대학생 조유정(고윤정)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설정이었죠. 방주경(전혜진)은 박평호와 연관성이 조금은 있지만 출연신이 두 신밖에 없었어요. 장철성(허성태)이라는 인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요. 상당 부분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주제로 가는 방향에 조금 집중도를 높이고 두 인물의 텐션을 높이는 데 집중하게 됐어요.”

'헌트' 스틸컷 /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헌트' 스틸컷 /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작품의 배경은 1980년대 군부 정권 시대다. 518 민주화 운동, 아웅산 테러 사건, 이웅평 귀순 사건 등 실제 역사적 사건들도 모티브가 됐다. 이정재가 최근 몇 년 동안 양극화된 사회를 보면서 떠올린 시절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누구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닌지, 우리가 왜 이런 문제를 가지고 화합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주제를 잡게 됐다.

“그러다 보니 더 이념적이고 성격이 강한 군인과 북한 측 인물을 설정하게 됐어요. 그런 인물들이 이념적으로 치열한 시대가 80년도가 가장 심하지 않았나 생각했고요. 초고에는 80년도로 설정돼 있지만 현대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 버전도 하나 있어요. 그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동안 우리 사회의 뉴스들을 봤고, 다시 80년도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 역사 사건을 재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큰 사건이었고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잖아요. 그 유가족들이 지금도 생활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재연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태국으로 설정을 바꿨고, 행사장에 참여했던 국내 인사들이 폭발 직전에 버스에 타서 안전하게 나가는 쇼트가 반드시 필요했어요. 실제 사건과 명확하게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무겁고 민감한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많은 감독들이 그만둔 시나리오를 왜 내가 끝까지 쥐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엄습하면 괴로웠다. 원톱 구조를 투톱 구조로 균등하게 끌어올리다가 막힐 때는 손을 높고 싶었다. 한참 풀리다가도 결말에서 걸릴 때는 또 좌절했다. 그럴수록 자료를 찾는 것에 집중했다. 신빙성을 찾기 위해 더블 체크, 트리플 체크를 하며 기댔다.



고뇌 끝에 시나리오를 완성하니 연출이라는 숙제가 남았다. 시대극, 해외 촬영 등은 입봉 감독에게 쉽게 허락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연기자 출신 감독이라는 위험 요소도 있었다. 높은 장벽을 넘기 위해 시나리오 완성도에 더더욱 공을 들였고,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와 이모개 촬영 감독이 의기투합하게 됐다. 책임감은 더 막중해졌다.



완성된 ‘헌트’에는 이정재의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복잡하고 굵직한 사건들이 짜임새 있게 얽혀있고 러닝타임 125분 동안 긴장감이 계속된다. 박평호, 김정도 두 주인공들의 미묘한 신경전과 감정선도 섬세하게 나타난다.

“두 시간 동안 보여줄 수 있는 장면과 대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면 많지 않을 수 있어요. 대신 대사에서 느껴질 수 있는 의미와 뉘앙스를 복합적으로 만들고 싶었죠. 제가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동안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감정이 단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많이 시도했었거든요. 그렇게 오랫동안 연기를 하면서 해온 저의 스타일이랄까요. ‘헌트’ 작업을 하면서도 한 신에서 원하는 정보와 볼거리와 감정을 좀 더 다양하게 섞는 것이 이어졌어요.”



‘헌트’가 이정재 정우성이 영화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라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두 사람은 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3번 정도 진행해왔지만 쉽지 않았다. 심지어 ‘태양은 없다’ 김성수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게 때문에 ‘헌트’를 향한 호평은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초고를 접했을 때 우성 씨와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 수정 과정이 많이 미흡했죠. 우성 씨는 ‘연출을 결심했으면 연출만 해도 쉽지 않은 건데, 많은 사람들이 둘이 나오는 영화를 기다리는 것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가’라는 마음이었고요. 또 ‘큰 숙제인데 한방에 다 해결한다는 것은 너무 욕심 아니냐. 너무 과한 거 아니냐’라고 했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독님을 찾게 됐었고요.”

“시나리오 혹은 프로젝트가 미흡하더라도 ‘친하니까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렇게 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우성 씨가 3~4번의 거절을 했고 어렵게 캐스팅했어요. 친하고 안 친하고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치밀하고 프로 근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서로 각을 세우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이유가 있다. 많은 이들이 ‘청담동 부부(이정재·정우성을 부르는 별명)가 처음에 어떻게 나올까’라고 기대하는 시선에 반전을 주고 싶었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부딪히고 충돌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기자들은 작품의 큰 흐름을 생각해요. 본인 캐릭터와 상대방 캐릭터가 큰 흐름에서 어느 정도의 템포와 온도를 맞춰가면서 함께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시나리오 안에 답이 있다고 믿고 현장 안에서의 호흡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고요. 뛰어난 배우와 일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소예요. 본인 연기도 더 좋아 보이고 상대방과의 하모니로 인해 극이 더 풍성해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우성 씨는 경험치가 많은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그런 호흡을 통해 훨씬 더 긴장감 있는 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뚜껑을 연 ‘헌트’는 일찌감치 국내외 호평을 얻고 있다. 제75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공식 초청돼 7분간 기립박수를 받고, 국내 시사회 이후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예매율 1위에 등극했다. 하지만 이정재는 순항하는 순간에도 차기작에 대한 질문을 듣고 “연기할 것”이라며 “연출 못하겠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쳐 웃음을 자아냈다. 쉼 없이 달려온 결승선에서 기분 좋게 터트릴 수 있는 탄식이다.

모든 행보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 그는 30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자로 나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이가 있다 보니 후배나 동료들이 저의 좋았던 경험, 실패했던 경험을 듣고 싶어 해요. 어떤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어떻게 해야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때문에 해외에서도 일을 하게 되다 보니 경험자로서 ‘외국에 가면 이런 걸 선호하더라’ 같은 걸 말해주고 있어요. ‘헌트’ 뒤풀이 자리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어요. 이제 당신 차례라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연기자가 무슨 연출이야. 연출자가 무슨 제작이야’ 이런 말이 많았어요. 지금은 멀티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충분히 다 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어요. 제가 잘나서, 잘 할 수 있어서가 아니에요.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말이 우리 사회에 큰 희망과 용기인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격려와 응원을 해줄 수 있는 문화가 영화계 안에서 시작돼서 확산됐으면 해요.”


추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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