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한중수교 이후 30여년 동안 우리나라 외화벌이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지만, 이 같은 역할도 올해가 마지막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중국은 디스플레이, 배터리, 스마트폰, 반도체 등의 기술을 지난 30년간 빠르게 업그레이드하며 한국산업의 최대 경쟁자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매년 흑자를 기록했던 대 중국 무역도 올들어 석달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한중수교 30주년을 기점으로 산업전략을 재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말 내놓을 수출활성화방안에 ‘산업고도화 전략’을 담을 계획이다. 정부는 이달말 주요산업군 육성 전략을 수출활성화 방안을 통해 개괄적으로 공개한 후 다음달 초 자동차 산업육성전략을 시작으로 조선, 디스플레이, 배터리, 에너지벤처 등 10여개의 주요산업군 전략을 순차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정부가 발표 예정인 주요산업 고도화 전략이 모두 중국과 경합관계에 있는 산업군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벌리기 위한 정부차원의 대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우리나라에 일방적으로 이익을 안겨줬던 한중 간 무역은 중국의 주요산업 내재화 등으로 손실전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해관총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교역에서 가장 많은 흑자를 기록하는 나라 순위에서 26년간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지만 올해에는 대만, 호주, 브라질에 이어 4위로 주저앉았다. 이 같은 추세라면 주요 흑자국 순위에서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같은 무역흑자 감소는 한국이 생산한 중간재를 중국이 완제품으로 만들어 글로벌 시장에 수출하는 양국간 ‘분업구조’에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제 14차 5개년 규획(2021~2025년)’에 내수시장 확대를 목표로한 ‘쌍순환 전략’을 포함시키는 등 자국산업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을 비치고 있다. 김현욱 한국개발원(KDI) 국제대학원 교수는 “대중 적자가 중국의 도시봉쇄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중국 기술력이 고도화 되고 있는 만큼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우리나라 또한 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 등도 한시바삐 없애야 한다”고 밝혔다.
한중수교 30년 누적 무역흑자 7099억달러.. 향후 30년간 토해내나
1992년 체결된 한중수교는 한국경제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무역협회 수치에 따르면 1992년부터 올 7월까지 중국과의 무역에서 기록한 누적흑자 규모는 7099억달러(약 933조원)에 달한다. 지난 30년간 미국과의 무역에서 기록한 누적흑자 규모인 3066억달러의 2배가 넘는다. 중국이라는 ‘거인의 등’에 올라타 한국이 이른바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국대열에 올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중국이 지난 30년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규모의 경제를 확보한 것은 물론 기술고도화까지 이뤄내며 한국의 주요산업과 글로벌 시장에서 맞붙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기차용 배터리나 디스플레이 등은 이미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며 메모리반도체 또한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낸드플래시는 부분 내재화에 성공하는 등 ‘대륙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이 지난 30년간 한국과의 무역에서 빠져나간 외화를 이제부터 본격 회수하는 작업에 들어섰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 중국 무역에서 2013년 628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이후 흑자규모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지난해 양국간 무역규모는 사상 처음으로 3000억 달러를 넘어섰지만 무역흑자는 242억달러로 2013년과 비교해 절반 규모가 채 되지 않는다. 글로벌 공급 부족과 수요 과잉이 맞물리며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오르는 이른바 ‘반도체 슈퍼사이클’ 기간에만 무역흑자 규모가 반짝 늘어날 뿐 하향세가 지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올 들어서는 연간기준 대 중국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5월 10억9000만달러의 대중 무역적자 기록을 시작으로 6월(12억1000만 달러)과 7월(5억7000만 달러)에도 적자가 이어졌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석달연속 적자를 기록한 것은 한중수교 이후 처음이다. 관세청 잠정집계 결과 이달 상순(8월 1~10일)에도 대중 무역적자 규모가 8억9000만 달러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기준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할 수 있다는 우려가 괜한 엄살이 아닌 셈이다.
정부당국은 이 같은 대중 무역적자가 상하이 등 중국의 도시봉쇄 영향이 가장 큰 이유라는 입장이다. 실제 중국은 4월부터 두달여 동안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도시 봉쇄 조치를 실시했으며 6월부터 단계적 해제 조치에 나서고 있다.
보조금·기술빼가기로 성장.. 이제 韓 턱밑 겨눈다
반면 산업계에서는 대 중국 무역적자가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다. 한국에서 생산한 중간재를 중국이 완제품으로 만들어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양국간 분업체계가, 중국의 기술 고도화 및 주요산업 내재화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무역협회 분석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의 수출경합도는 2011년 0.347에서 지난해 0.390으로 상승하는 등 국제무역시장에서 양국간의 경합이 심해지고 있다.
중국 시장 냉서 한국제품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다. 중국수입시장에서 한국산 하이테크 제품군의 점유율 또한 화학제품이 지난해 9.3%를 기록해 2017년 대비 10.8%p 하락한 것을 비롯해 전자통신기기(19.7%→18.1%), 과학기기(20.4%→11.8%) 등 대부분 제품군이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국은 10여년 전부터 자국산 제품 성장 전략을 추진중이며 제 14차 5개년 규획(2021~2025년)에는 내수시장 확대를 목표로한 ‘쌍순환 전략’을 포함시키는 등 한국 산업과의 ‘동조화(커플링)’ 낮추기에 힘쓰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경제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한국경제의 중국 종속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중국은 2007년 글로벌 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1%를 기록하며 독일에 이어 3위로 올라섰으며 2010년에는 관련 비중을 9.2%까지 끌어올리며 일본까지 제쳤다. 영국 싱크탱크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2030년에는 중국 GDP가 미국을 제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국은 2013년 국제 무역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1%에 달하며 미국을 제치고 글로벌 1위 무역대국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산업계에서는 지난 30년동안 중국의 이 같은 가파른 성장 배경에 한국의 역할이 컸다며 쓴웃음을 짓고 있다. 한중수교이후 한국기업이 중국 내수 시장 공략에 몰두해, 중국의 기술 및 인재빼가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중국의 기술고도화에 상당부분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중국은 자국에 한국 주요기업 공장을 대거 유치한 후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몰아주는 방식 등을 동원해 한국 기업의 성장을 방해하는 한편 자국기업의 덩치는 빠르게 키웠다.
대표적인 분야가 스마트폰이다. 중국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는 2014년 차이나모바일·차이나텔레콤·차이나유니콤 등 중국 주요 이통사를 대상으로 휴대전화 보조금 감축을 강제해, 고가폰 위주였던 삼성전자를 중국 현지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시켰다. 이 때문에 2013년만 하더라도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20%로 1위를 차지했던 삼성전자는 2019년 중국 현지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완전 철수하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은 한국과 미국이 양분했지만, 2020년대 들어서는 오포·비보·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의 글로벌 점유율이 30%를 넘어선다. 중국은 또 2016년부터 자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CATL과 BYD를 키웠다.
디스플레이 분야는 사실상 한국이 중국 산업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BOE는 지난 2003년 액정표시장치(LCD) 업체인 하이디스(옛 현대전자의 LCD 사업부)를 인수한 후 기술 및 인력 빼가기 등으로 기술력을 빠르게 업그레이드 했다. 이후 중국 기업들은 자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을 바탕으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한국의 미래 디스플레이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 중이다. 반도체 분야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
최근 7나노급 선단공정 기술 확보에 성공했다고 밝힌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는 5년전 삼성전자 부사장 출신인 양몽송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하며 기술력을 빠르게 업그레이드 했다. 올해에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장비를 중국 기업에 유출한 이들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등 중국의 한국 기술·장비 빼가기 사례는 꾸준히 보고 되고 있다.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대중 무역적자 확대는 한중간 산업 협업구조가 바뀌고 있는 조짐으로 봐야 한다”며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베트남이나 여타 국가에 대한 투자를 늘려 산업협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밝혔다.
中에 멱살잡힌 韓.. 양국 무역분쟁시 韓 피해 6배↑
한국과 중국간의 무역갈등이 발생하면 어느쪽이 큰 피해를 입을까. 산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중국대비 6배 이상 큰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경제에서 중국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반면, 중국경제의 한국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국의 ‘칩4’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가입 문제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와중에, 산업계가 노심초사 하는 이유다.
산업연구원의 ‘중국 대외교역과 한·중 간 무역’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10년간 20~25% 수준으로 나타났다. 반면 중국 무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7%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내수시장이 작아 중국 대비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 분류됐다. 국내총생산(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인 ‘무역의존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최근 10년간 70%대를 기록한 반면, 같은 기간 중국의 무역의존도는 38%에 불과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무역의존도 및 상대국과의 무역비중을 복합적으로 고려할 경우 한국경제의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게 나타났다. 산업연구원 분석 결과 한국의 GDP 대비 대중국 무역의존도는 최근 10년 평균 15.7% 수준이었다. 반면 중국의 한국 무역의존도는 2.5%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이 발생할 경우 한국 경제가 받는 영향이 중국 대비 6배 이상 클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지난 30여년동안 이 같은 무역구조가 고착화 되면서 양국간 무역분쟁 발생 시 한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다만 양국 산업간 ‘동조화(커플링)’ 경향이 강한 만큼 중국이 무역분쟁 카드를 꺼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020년 기준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품목의 80%가 자본재인데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품목 중 자본재 비중 또한 61% 수준이다. 박재곤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중 간의 무역은 자본재와 중간재가 대부분을 차지해 양국 경제는 쉽게 ‘분리(디커플링)’ 되기 어려운 구조”라며 “무엇보다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은데다 무역 중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중국은 ‘불가근불가원’.. 한중수교 포스트 30년 대비전략 필요
“칩4와 관련해서는 중국을 배제한다는 시그널을 줘서는 안됩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꾸준히 강화해 나가면서 미국이란 관련 사안을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은 미국·한국·일본·대만 등 4개국이 결성을 추진중인 ‘칩4’와 관련해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국익을 챙기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국 측은 칩4 결성과 관련해 “한국이 최대 교역 상대인 중국을 상대로한 기술견제 분야에 맹목적으로 참여할 경우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꾸준히 반바라고 있다.
수교 30주년을 맞은 한중관계가 단순 한국과 중국간의 양자 관계가 아닌 중국·미국·일본 등 여러 나라가 얽히고 설킨 다자관계로 바뀌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으로 알려진 다자간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가 올 5월 출범하며 한중 관계를 둘러싼 외교·통상적 경우의 수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 일수록 실리에 기반한 외교·통상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미국과의 협력 범위는 꾸준히 넓혀가는 한편, 한국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중국과의 관계 또한 신중히 관리해 한중수교 ‘포스트 30년’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우리정부는 미국 측이 요청한 칩4 예비회담 참석과 관련해 의제 마련에 고심 중이다. 정부는 국내 반도체 수출 비중의 과반을 차지하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 측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개별 기업의 칩4 참여 배제를 요청할 것으로 전해졌다. 칩4가 민간이 아닌 각국 정부간의 협력체라는 것을 강조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개별기업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한 복안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운영중인만큼, 중국 측의 대응에 따라 공장운영 차질 등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정부는 중국에 반도체 수출 시 칩4 차원의 통제가 없도록 관련 대책도 수립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중국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만큼 대만과의 관계설정에도 고심을 거듭 중이다.
전문가들은 칩4가 ‘반중(反中) 연합’ 아니라는 점을 중국 측에 납득시키면서도, 칩4를 반도체 관련 ‘지정학적 리스크’는 낮추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현욱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칩4는 국제협약과 같이 강제성이 없는,우방국간의 반도체 공급차질을 맞기 위한 협력체“라며 “칩4에 미·중 진영대결 등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측에 이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칩4는 실무자급의 다자 대화창구로, 칩4 가입시 미중간의 대립 사이에서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미국 상무부가 주도하고 있는 IPEF 또한 ‘대 중국 포위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등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이 한중관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관리 중이다.
미국이 빠진 다자 협력체를 통해 한중간 협업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뉴질랜드·칠레·싱가포르 등이 주축이된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을 비롯해 일본이 주축이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을 신청하며 최근 몇년 새 다자외교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 정부 또한 이들 협정 가입을 통해 다자 협업구도를 확대하는 한편 중국과의 접점도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2015년 체결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서비스·투자 부문 개선 작업에도 나서는 등 중국과의 양자통상 분야 협업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중국과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며 “미국 대통령이 바뀌면 칩4나 IPEF 등 미국의 대 중국 정책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중국관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