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이어진 제10차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평가회의가 러시아의 몽니로 결과문도 채택하지 못한 채 폐막됐다.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포격에 대한 비판에 반발한 러시아가 어깃장을 놓으며 두 차례 연속 회원국 간 합의가 불발되면서 국제사회의 핵무기 확산 억제 노력이 요원해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7일(현지 시간) 외신들에 따르면 191개 회원국들은 평가회의 마지막 날인 26일 결과문 초안을 놓고 장시간 논의했으나 끝내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2026년 차기 NPT 회의 일정에 대한 절차적 내용만 정한 채 회의를 마쳤다. 중동 내 대량파괴무기(WMD)를 놓고 이견이 많았던 직전 2015년 회의에 이어 두 차례 연속 최종 결과문 없이 빈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합의를 가로막은 것은 러시아의 막판 조항 수정 요구였다. 구스타보 슬라우비넨 NPT 평가회의 의장은 “러시아가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조약의 수정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초안에는 ‘원전 인근 군사 활동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우크라이나에 의한 원전 통제 보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문구와 함께 방사성 물질 유출 방지를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현장 방문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러시아가 관련 문구 5개의 수정을 요구하면서 최종 합의에 실패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러시아 외무부 비확산 및 군비통제국의 이고리 비시네베츠키 부국장은 “안타깝게도 이 문서에 관한 합의가 없었다”면서 많은 국가가 초안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스페인 EFE통신은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초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고 전했다.
베아트리스 핀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사무총장은 “극도로 위험한 세계 정세에 직면한 가운데 전혀 진중하지 못하고 완전히 무책임한 결과”라며 “핵무기의 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역시 “우리의 집단적 안보를 위협하는 긴급한 과제에 대처할 수 없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NPT는 핵무기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약속을 토대로 핵 군축 결의를 다지고 이행을 점검하며 새로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5년마다 회의를 연다. 이달 1일부터 시작된 이번 평가회의는 당초 2020년으로 예정됐지만 팬데믹의 여파로 연기되면서 7년 만에 개최됐다.
한편 이날 우크라이나 국영 기업인 에네르고아톰은 “러시아군이 하루 종일 자포리자 원전 부지를 포격해 기반 시설에 피해가 발생했다”면서 수소와 방사성 물질 누출 및 화재 위험을 경고했다. 러시아는 원전의 방사능 수치가 정상 수준이며 포격은 우크라이나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