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값이 1400원 선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하락하면서 수출 기업들의 고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원화 가치 하락(원·달러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의 제품 가격 경쟁력 확보로 이어져 수출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최근의 환율 상승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가격이 뛴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 부담을 동반한 ‘나쁜 원저’로 수출 기업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위안화와 엔화 등 수출 경쟁국들의 통화 역시 달러 대비 약세를 이어가면서 수출 기업들은 제품 경쟁력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나쁜 원저’의 덫에 걸린 대표적인 업종이 석유화학이다. 석유화학 업계는 나프타(납사)를 기초 원료로 사용해 제품을 만든다. 하지만 원화 가격이 떨어지면 나프타의 수입 가격이 상승해 수익성이 악화되는 구조다. 보통 환율이 오르면 제품 가격도 따라 올라 나프타 원료 가격의 상승분을 상쇄시킬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글로벌 경기 둔화로 석유화학제품 수요가 감소해 환율 상승에 따른 원가 부담을 제품 가격에 제때 반영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처럼 수요가 낮아 가동률이 떨어질 때는 고환율에 대한 이득을 보기 어렵다”며 “가동률이 낮아 제품 가격은 올리지 못하는 반면 나프타 등 원료를 비싸게 사와야 하기 때문에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해외투자 확대로 외화부채를 많이 보유한 배터리 업계도 ‘나쁜 원저’에 울상이다. 배터리 업체들은 달러로 자금을 조달해 북미 지역에 공장을 짓고 있는데 환율이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달러 빚도 급증했다. 올해 LG에너지솔루션의 외화부채는 4조 2493억 원으로 지난해(3조 4119억 원)보다 24.5% 늘었고 삼성SDI의 외화 단기차입금도 6개월 새 8357억 원에서 9674억 원으로 15.7% 증가했다.
해외 신규 투자 부담도 커지고 있다. 배터리 3사는 현재 북미 지역에 배터리 공장의 신·증설을 추진 중이다. 환율 상승세가 진정되지 않으면 이들 기업은 당초 계획한 해외투자액을 늘려야만 한다.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은 당초 올 하반기 미국 애리조나에 1조 7000억 원 규모의 공장 투자 계획을 세웠지만 비용 상승 여파로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철강 업계는 ‘나쁜 원저’ 탓에 모처럼 찾아온 원자재 가격 하락의 특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제품의 원료인 철광석은 주로 달러로 결제하는데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원자재 가격 하락분을 고스란히 반납했다. 올 초 122달러였던 철광석 가격은 이달 중순 96달러로 20%가량 빠졌다. 하지만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은 1190원대에서 1400원대까지 20% 가까이 상승했다. 원자재 가격의 하락을 넋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철강 업계는 환율 상승에 따른 제품 가격 상승도 기대하기 어렵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철강 수요 악화에 중국의 철강 재고까지 더해지며 제품 가격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의 8월 말 철강 재고는 연초 대비 41% 증가하며 철강 가격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불황의 긴 터널을 뚫고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로 호황을 맞은 조선사들도 높아진 라이선스 비용 때문에 근심이 늘고 있다. LNG 운반선 건조 기술은 한국 조선사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LNG 화물창 등 핵심 기술은 해외 기업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화물창은 프랑스의 GTT사에 선박 건조 때마다 선가의 5%가량을 기술료로 지급해야 한다. 3월 원·달러 환율이 1205원일 때 120억 원 정도 내던 기술료는 현재 150억 원 가까이 불어났다. 앞으로도 문제다. LNG 운반선 수주는 계속 늘고 있는데 환율 상승 때문에 앉아서 떼이는 돈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한국의 수출 규모가 커서 원·달러 환율 상승에 따른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국가의 통화도 약세여서 가격 경쟁력에 큰 도움이 안 되고 있다”며 “원자재 비용 부담이 큰 만큼 원재료를 미리 구매하는 등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