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굴데굴 굴러갈 듯한 크고 동그란 눈, 기다란 코와 짧은 선으로 스윽 그은 입술. 너무나 단순하지만 눈동자의 위치만으로도 인물은 웃고 놀라고 울고 찌푸린다. ‘21세기의 키스 해링’이라 불릴 법한 그라피티(graffiti·벽화) 작가이자 일러스트 예술가인 장 줄리앙(40)의 작품들이 한국에 왔다. 10월 1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지하 2층 전시1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 ‘그러면, 거기’를 위해서다.
작가의 이름이 조금 낯설지라도 그의 그림을 본다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종이에 사람을 그린 후 오려낸 듯한 유려한 곡선의 의자, 동그란 눈에 앙증맞게 혀를 내민 얼굴 모양 쿠키, ‘숯검댕이’ 눈썹과 콧수염이 그려진 주방 장갑 등 전 세계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특별한 점은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끄적이고 작업해온 100권의 스케치북을 처음 공개했다는 사실이다. 30일 DDP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작가 줄리앙은 “전시 도입부에 선보인 스케치북 섹션은 18년간 작업한 일기와도 같은 나의 모든 기록”이라며 “내가 그땐 이랬구나 싶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나의 긴 여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줄리앙은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났고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과 왕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단순한 형태에 장난스러운 그림체지만 작품 내용은 촌철살인이다. 바닷가에 놀러 나온 듯한 민머리 사나이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붉게 탄 그의 몸에서 유독 귀 부분만 새하얗다. 그 하얀 부분이 딱 휴대폰 크기만 하다. 휴가 중임에도 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풍자가 감지된다. 줄리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가장 동시대적인 소통 방식’을 활용할 줄 아는 작가지만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콘센트에 꽂힌 충전기가 수갑처럼 손목을 묶은 인물 작품이 날카롭게 꼬집는다. 작가는 “나는 비판적인 성격이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기보다 불쾌한 것들을 유쾌하게 바꿔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드로잉에 몰입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내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타인과 소통하기에 드로잉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면서 “드로잉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만나도 통역이 필요 없다. 내가 단순하게 작업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의 첫 대규모 전시를 위해 작가는 개막 보름 전에 입국해 DDP에서 현장 드로잉을 진행했다. 전시 동선 안내와 출입구 표시 등 곳곳에서 작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야외 잔디마당에는 두 사람이 양손을 맞잡은 모양의 설치작 ‘퓨젼(협력)’, 끌어안을 수 있는 팔이 여러 개인 문어 모양의 ‘오또(Otto)’ 등이 설치됐다. 한 장 한 장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게 전시된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영상, 수건·그릇·옷·스케이트보드·가구 등 컬래버레이션 작품 등 출품작이 1000점에 달하기 때문에 관람을 계획한다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게 좋겠다. 내년 1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