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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정권마다 외친 공공기관 혁신…낙하산·노사유착·불합리 잣대로 실패”

◆尹정부, 공공기관 개혁 성공하려면

퍼펙트스톰 속 우리 경제 생존 기로…구조 개혁 필요

尹정부 '공공기관 파티 끝났다'며 혁신 나서는 것 당연

'낙하산' 인사 여전…노조·공무원 기득권도 타파해야

R&D기관 예산, 다른 공기업과 동일잣대 감축은 문제





글로벌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이 몰아닥치고 있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3고(高)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25년 전 환란(換亂)의 뼈아픈 기억이 떠오를 정도다. 특히 미중 패권 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신냉전 확대로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전략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우리 경제는 생존의 기로에 섰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6월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의 파티는 끝났다”고 밝힌 것은 이런 위기감의 발로였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윤석열 대통령 역시 “평가를 엄격히 하고 방만하게 운영돼온 부분은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고 힘을 실어줬다. 이후 정부는 공공기관 인력·예산 축소 등 혁신 방안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도 ‘낙하산’ 내리꽂기라는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퇴직 후 자리를 생각하는 공무원과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노조도 여전히 혁신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 분야에도 부채가 많은 다른 공기업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미숙함 또한 드러내고 있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경영평가단장을 지낸 염재호 SK이사회 의장 겸 태재대 설립위원장은 “역대 정권마다 공공기관 혁신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낙하산, 노사 유착, 불합리한 잣대 등으로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던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돈 벌어 이자도 못 내는 공기업이 절반=공공기관 수는 2007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298곳에서 현재 350곳으로 늘었다. 총예산 규모가 761조 원으로 정부 예산보다 30%나 많다. 공공기간 부채는 2017년 493조 원에서 지난해 583조 원까지 급증했다. 공기업 정규직의 평균 보수는 8095만 원이고 복리후생도 민간 기업보다 좋다.

하지만 지난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한 공기업이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해 전체 공기업의 절반에 달할 정도이다. 이렇게 경영이 악화된 원인은 요금을 제때 올리지 못한 구조적 측면과 함께 방만 경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공기관의 예산 낭비와 느슨한 조직 운영, 노사 유착 실태 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기재부는 기능·조직·인력·예산·자산·복리후생에 대한 대규모 개선 방침을 밝혔다. 중복되는 공공기관 통폐합과 연공서열 파괴 등에도 나서기로 했다. 공공기관 지정 기준도 15년 만에 재조정해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수를 기존 130개에서 88개로 줄이기로 했다. 공공기관 평가에서 문재인 정부 시절 주요 평가 지표로 쓴 사회적 가치 비중은 대폭 축소하고 재무관리 기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경영 평가 성적이 나쁜 공공기관들에는 성과급 반납 조치나 기관장 해임 조치 등도 내렸다. 감사원은 한국전력 등 30개 공공기관의 재무 건전성 및 경영 관리 실태 감사에 들어갔다.

◇역대 정권마다 혁신 외쳤으나 성과는 미흡= 역대 정권마다 집권 후 공공기관 혁신을 강조했으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외환 위기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공공 분야 등 4대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했다. 공공기관을 통폐합하고 포스코·KT 등을 민영화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적극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공공기관 선진화’를 내세우며 공공기관 통폐합과 기능 조정 등을 담은 선진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4대강 사업과 해외 자원 개발 등의 국정 프로젝트에 공기업을 동원하면서 구조 조정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기관의 합리화·정상화 등을 내걸고 방만 경영 개선에 나섰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때는 공공기관의 효율성과 공공성의 조화를 내세우는 바람에 외려 공공기관이 비대해졌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뿐 아니라 공공기관 평가에서 일반 경영 실적의 비중 축소, 성과연봉제 폐지 등을 추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에너지 값 급등이 겹치면서 공공기관의 재무 상태도 악화됐다. 이에 국민의힘은 “전문성 없는 캠코더(대선 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노조와 결탁해 사실상 개혁을 가로막고 방만 경영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18개 공공기관이 신설되고 전체 공공기관 인력이 30%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보수·진보 안가리고 지속되는 ‘낙하산 인사’ 구태=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라는 구습은 보수·진보 정권을 떠나 계속되고 있다. 공공기관의 수장과 감사·이사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코드에 맞는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낙하산으로 내려보낸데 이어 임기 말에도 이른바 ‘알박기’ 식으로 공공기관 간부로 임명했다. 이들 가운데 김제남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 등 대부분이 정권 교체 이후에도 사퇴하지 않고 있다는 게 여당의 볼멘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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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도 공공기관장과 감사 자리에 전문성이 떨어지는 낙하산을 속속 내려보내고 있다. 우선 에너지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무관한 정치권 인사들이 에너지 기관장에 속속 입성할 태세다. 한국가스공사 사장에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 최연혜 전 의원,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에 정용기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각각 거명된다.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민간 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전문건설업자 6만 명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건설공제조합은 관련 경력이 없는 이은재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수장으로 내정됐다. 지난 대선에서 호남에서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박주선 전 의원은 대한석유협회장으로 내정됐다.

방만경영을 감시해야 할 감사 자리도 마찬가지다. 한국수력원자력은 과거 한나라당 시절 지역구 사무국장을 지낸 최익규 씨를 지난달 감사로 발령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도 이영애 전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을 상임감사로 임명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도 김쌍우 전 부산시의원에게 상임감사를 맡겼다.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는 8월 말 국회 환경노동위 국민의힘 간사인 임이자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김응박 씨를 상임감사로 임명했다.

지난해부터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공공기관의 감사로 추천할 수 있는 후보자 요건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공공기관이 관료들의 퇴직 이후 노후 보장처라는 관행도 이어지는 바람에 한국공항공사와 국가철도공단 노조는 최근 ‘국토교통부 관료 출신 낙하산 상임이사 반대’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공기업 방만 경영과 노사 유착 지속도=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김영선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영업 실적이 있는 공공기관 340곳 중 161곳(47.4%)이 영업 손실을 냈다. 36개 공기업 중 한전·강원랜드·인천국제공항공사·한국공항공사·한국광해광업공단·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등 14곳은 영업 이익률이나 순이익률이 적자를 보였으나 경영평가 C등급 이상으로 임직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했다. 김 의원은 “공공기관장의 지난해 1인당 평균 연봉이 1억 8021만 원인데 경영 평가 C등급 이상만 돼도 7200만 원가량의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도 여전하다. 올 상반기에만 약 14조 3000억 원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한 한전은 법인카드를 무분별하게 쓴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전 서울본부 기획관리실 경영지원부의 경우 지난해 3월 한 직원의 정년퇴직 행사 후 점심 회식을 하며 409만 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당시는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와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가 이뤄지던 때였다. 한전은 올해 전기 요금을 4월과 7월에 이어 이달에도 인상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약 2조 7116억 원의 적자를 냈으나 임직원들에게 3504억 원의 성과급과 1154억 원어치의 복지 포인트를 지급했다. 같은 기간 코레일 사장은 2억 원의 성과급을 받았다. 지난해 공공기관 경영 평가에서 코레일은 36개 공기업 등 전체 130개 평가 기관 중 유일하게 최하등급(E)을 받았다. 코레일과 수서고속철도(SRT) 등은 3급 이상 간부를 중심으로 ‘공짜 숙소’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코레일의 경우 서울·대전 등에 150채의 오피스텔·아파트를 3급 이상 간부에게 제공하고 관리비·공과금만 내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한화그룹의 대우조선 인수 추진과 관련해 대우조선 노조가 현 대주주(55.7%)인 산업은행에 매각 이후 경영진 임기 보장이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한 것도 구설에 올랐다. 앞서 박두선 대우조선 대표는 문재인 정부 임기 말인 올해 3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명됐다. 대우조선은 1998년부터 지금까지 12조 원이 넘는 공적 자금이 투입됐으나 부채비율이 676%에 달한다. 공공기관의 오랜 노사 유착 관행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노조 등은 방만 경영에 대한 질타와 관련해 “매출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요금 때문에 구조적으로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공공운수노조는 최근 나라살림연구소에 의뢰한 ‘공공기관 경영분석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코레일·서울교통공사·지역난방공사 등의 사례를 들었다. 한전은 연료비 상승에도 전(前) 정부에서 전기 요금을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도매금’으로 과학기술 R&D 기관 조직·예산 삭감은 문제=기재부가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도 같은 잣대로 구조 조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정필모 의원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9월 초 기재부에 출연 연구소의 자체 혁신안 초안을 제시했지만 기재부는 조직·인력·예산 등을 더 줄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기재부는 출연연을 직접 전화와 e메일 등으로 압박했다. 25개 과학기술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도 출연연에 정원 축소 공문을 보냈다. 출연연들이 연구 장비와 기계 설비 등을 매각해 비용을 저감한다는 계획서를 제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 과방위의 조승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 출연연을 부채가 많은 다른 공기업과 같은 공공기관으로 취급해서야 되겠느냐”며 “자칫 과학기술 역량이 크게 훼손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원한 한 출연연 원장은 “제가 있는 연구소의 내년 예산이 2%가량 깎였는데 국가 R&D의 생산성을 높이는 쪽에 구조조정의 초점을 맞추는 것에는 동의한다”며 “하지만 정부가 연구 방향과 우선순위 선정, 인력 채용·관리 측면에서 출연연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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