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불안과 이에 따른 소비 위축으로 국내 수출 대기업들이 잇따라 ‘감산 경영’에 돌입했다. 쌓이는 재고에 대응해 생산을 줄이고 내년 사업·투자계획을 다시 짜는 등 기업들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전기·전자, 석유화학, 철강 등 주요 수출 업종의 대표 기업들은 생산 설비를 감산 운영하면서 비상 경영 체제에 속속 나서고 있다. 경기 침체로 수요는 계속 줄어드는데 원자재 가격은 급등하는 상황에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는 것은 손해라는 판단에서다.
삼성전기(009150)는 이날 실적 발표 후 진행한 컨퍼런스콜에서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출하량이 3분기 대비 소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4분기 가동률이 3분기 대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확실성으로 가동률 반등 시점의 예측이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재고 처리에 사활을 걸고 있는 정보기술(IT) 업계의 수요 감소 여파로 당분간 MLCC를 비롯한 주요 주력 제품들의 판매 부진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 회사의 투자 규모에 대해서도 “올해 투자 계획이 소폭 감소했고 내년은 올해보다 감소할 것”이라고 전했다.
TV 수요 감소로 허덕이고 있는 LG디스플레이(034220) 또한 주력 제품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액정표시장치(LCD) 시장 철수를 서두르기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와 거시경제 악화로 공장 가동률 조정이 불가피하다”며 “향후 TV 수요에 따라 가동률을 올려갈 것”이라고 했다.
메모리반도체 수요·판매가격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삼성전자(005930)의 경우 “감산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시장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감산 선회 가능성이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원자재 가격 폭등의 직격타를 맞은 석유화학 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 대표 화학 기업인 롯데케미칼(011170)은 올해 상반기 울산공장 메타자일렌(MeX) 1개 라인과 파라자일렌(PX) 1개 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MeX는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도료 등에 쓰이는 고순도이소프탈산(PIA)의 원료로, PX는 PET병 등의 원료인 테레프탈산 제조에 사용된다. LG화학(051910)은 한시적으로 여수 공장 가동률을 5%포인트 낮췄으며 여천NCC·대한유화(006650) 등은 정기 보수 등을 통해 공장 가동을 일부 중단하는 방안을 택했다.
석유화학 업계의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가격)는 8월 톤당 108달러까지 떨어진 후 최근까지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 톤당 300달러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시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범용 제품일수록 글로벌 공급 과잉에 따른 타격이 커 당분간 물량 조절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철강 업계의 경우 자동차·건설 등 전방 산업 수요 감소로 내년 감산 가능성이 제기된다. 수요가 줄면서 글로벌 주요 업체들 모두 감산 압력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포스코홀딩스는 24일 잠정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미국 등 각국 긴축으로 철강 업계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본다”며 “글로벌 철강사들은 저가 판매보다 감산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포스코는 탄소 중립을 위해 양적보다 ‘질적 성장’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업계에서는 시장 상황 등을 감안할 때 사실상 감산 경영에 돌입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포스코의 제품 생산량은 지난 1년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포스코의 올 3분기 제품 생산량은 789만 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 줄었다. 3분기 포스코 제품 판매량 역시 794만 톤으로 같은 기간 12%가량 감소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부 포스코 제품 공장에서는 주문 감소로 인해 생산 스케줄 조정을 하는 등 일부 감산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대제철(004020)은 수요 감소에 따른 감산뿐 아니라 노조 파업에 따른 ‘셧다운’도 겪고 있다. 현대제철 노조는 9월 말부터 한 달 넘게 일부 공정에 대한 게릴라 파업을 진행 중이다. 이에 현대제철은 파업 영향에 따라 열연 공장 운영에 차질이 생겨 최근 냉연 공장을 일시 휴업하기도 했다.
자동차 업계의 경우 아직 대기 수요가 남아 있는 만큼 당장 감산에 돌입할 수준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다만 소비 침체로 신차 수요가 꺾일 수 있어 장기적인 생산량 감축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