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 16일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화를 투매하며 영국을 공격했다. 여기에 다른 헤지펀드도 가세해 파운드화가 폭락하자 영국중앙은행은 보유 외환을 풀어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전 세계 헤지펀드의 공격을 중앙은행 혼자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은 결국 하루 만에 파운드화 방어를 포기하고 마르크화와 화폐교환 비율을 유지해야 하는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서 탈퇴했다. 영국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이른바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독일의 금리 인상이었다. 당시 ERM 최대 경제국이었던 독일은 통일 후유증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고 마르크화는 폭등했다. 영국을 비롯한 ERM내 다른 유럽 국가들은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려 환율을 방어해야 했다. 고금리에 경기가 침체에 빠지고 고용이 악화하자 유럽 국가들은 금리를 올리거나 ERM 탈퇴를 택했다.
하지만 영국만은 시장과의 대결을 택했다. 당시 존 메이저 총리는 외환보유액이 넉넉하다며 ‘환율 방어에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소로스를 필두로 한 헤지펀드의 융단폭격에 백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영국은 당시의 교훈을 잊고 말았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세계적인 금리 인상 기조에도 홀로 대대적인 확장 재정을 택한 결과 파운드화는 폭락하고 국채금리는 폭등했으며 리즈 트러스 총리는 쫓겨났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총리직 사퇴 발표 전날(10월 19일)인 수요일 트러스가 총리직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막전 막후를 보도하면서 ‘트러스가 검은 수요일을 보낸 뒤 백기를 들었다’고 평했다. 글로벌 고금리 기조에 역행한 점, 모든 나라가 겪는 고통에서 영국만은 예외라고 자신한 점 등 30년 전과 현재의 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검은 수요일’이라는 말로 꼬집은 것이다.
영국이 두 차례의 검은 수요일을 보낸 이유는 단순히 트러스 총리의 패착만은 아니다. 기저에는 영국의 국가 경쟁력 약화가 자리 잡고 있다. 통화가치는 그 나라의 경쟁력을 숫자 하나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국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의 늪에 빠져 있다. 제조업 경쟁력 붕괴와 비효율적인 복지 제도 탓이다.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 부채(D2) 비율은 15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0.4%)을 크게 웃돈다. 2013년 남유럽 재정 위기를 촉발했던 이탈리아(183.9%)나 그리스(243%)보다는 낮지만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더구나 올 1분기와 2분기에는 각각 438억 6000만 파운드, 337억 7000만 파운드라는 기록적인 경상 적자를 기록했다. 과거부터 적자가 누적되던 차에 경기 침체와 에너지난이 닥치자 적자 규모가 평소보다 3~5배 불어난 것이다.
우리 상황도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6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고 있으며 관리재정수지도 4년 연속 적자 행진이다. 버팀목인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고 주요 수출국인 중국과 미국의 경제 상황도 심상치 않다. 월가 전문가들은 한국 원화를 태국 밧화와 함께 위기에 취약한 통화로 꼽고 있다. 워런 버핏은 물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위기의 순간에는 약한 고리부터 무너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