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글로벌 식량 위기 타개를 위해 7월 우크라이나와 맺었던 ‘흑해 곡물 수출 협정’에서 일방적으로 발을 뺐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군이 자국의 흑해 함대를 공격했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실상은 전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식량 무기화’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로 인해 가까스로 안정세를 찾아가던 글로벌 식량 가격이 다시 요동치면 전 세계 인플레이션과 기아 문제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29일(현지 시간) 성명을 내고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의 흑해 함대에 대규모 드론 공습을 감행했다”며 “민간 화물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만큼 러시아는 오늘부터 협정 이행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앞서 7월 22일 튀르키예·유엔의 중재 하에 흑해를 지나는 곡물 수출 선박의 안전을 11월 19일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만기가 다가오면서 재협정 요구가 많았는데 러시아가 돌연 빠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공격 사실을 부인하면서 “우리는 협정을 망치려는 러시아의 계획을 경고해 왔다(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고 비난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서방 위협 수단으로 곡물 수출 협정 중단을 노려 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책 분석가인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는 “블라디미르 푸틴은 서방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라며 “협정을 망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라고 진단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의 잇따른 영토 탈환에 밀려 동원령을 발동할 정도로 고전하는 가운데 유럽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에 굴하지 않고 대체 에너지 마련, 러시아 에너지 제재 등의 대응에 착수한 상태다.
우크라이나와 달리 러시아가 곡물 수출 협정에서 얻는 이득이 미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프로코펜코 전략가는 “러시아의 식량 수출은 서방의 제재를 받지 않지만 은행과 보험사들이 러시아와의 거래를 꺼리고 해운사도 러시아를 오가는 선박 운영을 중단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실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량은 9월 690만 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710만 톤)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러시아의 7~8월 곡물 수출은 전년 대비 22% 감소한 상태다.
세계는 러시아의 돌발 행동이 낳을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세계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흑해 수출 재개에 힘입어 밀 가격은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5월 중순 부셸당 12.79달러로 고점을 찍은 밀 선물 가격은 이달 28일 8.29달러로 전쟁 이전에 근접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지난달 농산물 수출량 중 56%를 나른 흑해 수출이 중단되면 밀 가격 상승은 불가피하다. 데이비드 라보르드 국제식품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밀 가격이 31일 개장 때 10%가량 오를 수 있다”며 “이미 비싼 식량 가격이 더 비싸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식량 가격 상승은 이미 심각한 세계의 인플레이션과 기근 문제 악화를 의미한다. 유럽연합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9.9%를 기록한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에너지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친 항목이 식품이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은 현재 45개국에서 5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아 직전에 있다고 집계했다.
서방은 일제히 러시아를 규탄하며 협상 재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의 결정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기아 위기를 증폭시킬 것”이라며 “협정은 유엔 협상으로 체결된 것인 만큼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도 “당사자들은 협정을 위태롭게 하는 어떤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