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뉴욕 전시는 죄다 젊은 ‘여성’ 작가들이다. 최근 많은 갤러리들이 앞다퉈 이들과 전속 계약을 맺은 결과다. 가을이 시작되던 9월 안톤 컨(Anton Kern) 갤러리의 줄리 커티스(Julie Curtiss) 전시를 시작으로 현재 뉴욕에서는 에밀리 매 스미스(Emily Mae Smith), 이지 우드(Issy Wood), 안나 웨이언트(Anna Weyant), 크리스티나 반반(Cristina BanBan)의 전시가 한창이다. 20대부터 40대의 이들은 최근 1~2년 새 세컨더리 마켓(2차 시장)인 경매에서 놀랄 만한 기록 경신을 이어왔고, 근래 들어서는 프라이머리 마켓(1차 시장) 내 유명 갤러리 전시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의 작업은 20세기 모더니즘 내 아르누보, 초현실주의, 입체파 등이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일시적 트렌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동시대를 반영하는 시대적 요구가 깊이 깔려 있다. 오랫동안, 미술사적으로 여성 아티스트들은 배제돼 왔다. 미술사조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비평가, 각종 미술관과 기관 수장들 대부분은 남성이었으며, 이들은 의도적으로 실력있는 아티스트들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시에서 배제했다. 신문·잡지 같은 언론 매체에서도 여성 아티스트를 언급하는 것은 꽤 오래 금기시됐다. 시대가 바뀌고 유리 천장을 깨는 여성들이 미술계 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20세기 여성 아티스트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와 조안 미첼(Joan Mitchell)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현재 주목받고 있는 젊은 동시대 여성 작가들은 이전 여성 작가 세대가 겪어온 것과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과거 여성의 역할을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보수적인 환경을 거부한다. 이들 부모 또한 ‘여성'의 삶을 강요하기보다는 한 인격체로서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격려했다. 이같은 환경은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작업, ‘남성'만이 미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편견 등을 자연스럽게 깨버릴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까지 맞물리니, 과거 남성 지배적이었던 미술을 재해석하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을 일시적 트렌드로 단정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이들의 작업이 프라이머리 마켓(1차 시장)에서 나온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컨더리 마켓(2차 시장)에 다시 나오고, 시장 가격이 너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과 다음 세대의 미래를 그려 본다면 ‘남성'과 ‘여성'의 젠더를 구분은 더 흐려질 것이고, 전환점이 되는 이 시기가 훗날 중요한 시점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후에 역사가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가 될 듯하다.
첼시에 위치한 펫즐(Petzel) 갤러리는 새로 이전한 공간에서 에밀리 매 스미스의 개인전 ‘Heretic Lace’를 열고 있다. 스미스는 미술 역사에서 오랫동안 여성이 모델로서 성적 관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림 속 여성의 신체성을 배제하는 작업을 한다. 스미스의 시그니처로 알려진 ‘브룸스틱’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40년대 디즈니가 제작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긴 빗자루를 연상시킨다. 스미스는 이 형상을 젠더를 알 수 없는 중립적인 이미지로 자신 작품에 자주 등장시킨다. 이번 개인전에는 작가가 초기부터 진행해온 ‘스튜디오’ 시리즈도 함께 전시됐다.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Art Nouveau) 장식 양식이 재해석된 작업들이다.
뉴욕 어퍼이스트에 위치한 마이클 버너(Michael Werner) 갤러리에서는 영국 출신의 이지 우드의 ‘Time Sensitive’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우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영화 스틸컷과 같은 사진 이미지를 재편집하고 재배치해 시각화 하는 작업을 한다. 어두운 톤과 두터운 질감이 특징인 그녀의 페인팅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법한 장면들이 낯선 비율의 캔버스에 담겨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 또한 어퍼이스트 지점에 올해 5월 막 전속 계약을 맺은 안나 웨이언트의 신작들을 처음으로 전시하고 있다. 올해 초 전속 계약 직후부터 그녀의 작품들이 경매에 자주 출품되고 있다. 어두운 검정과 초록색 바탕에 배치된 여성들은 매끄러운 질감과 부드러운 윤곽으로 표현돼 자크 루이 다비드의 페인팅을 떠올리게 한다. 고전적인 느낌과 함께 여성성이 강조된 이미지들은 기괴하면서도 폭력적인, 독특한 화면을 구성한다.
같은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스카스데트(Skarstedt) 갤러리는 지난해 크리스티나 반반과 전속 계약을 맺은 후 처음으로 개인전 ‘Mujeres’을 열어 신작을 소개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작가들과 달리 반반의 페인팅에서는 즉흥적인 표현력을 느낄 수 있다. 구도를 잡는 과정에서 오일 스틱과 목탄으로 빠르게 그린 선들과 묵직한 유화 물감들이 캔버스에 엉켜 다이내믹한 구성을 보여준다.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시키는 반반의 신작들에는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 신체가 성적 관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적이고 당당한 모습으로 담겨 있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