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문화 예술 척도는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에 있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과 ‘투란도트’는 각각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가 전 세계적으로 연주되는 일이 이뤄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문화적 저변의 확대가 바로 그런 것인데, 전 세계 무대에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오페라를 올린다는 꿈을 펼쳐보자는 것이죠. ‘K컬처’의 인기 속에 때가 왔다고 할까요. 당장 눈앞에 실질적으로 보이는 콘텐츠 외에도 전 세계의 문화 저변에 우리의 콘텐츠가 들어가서 한국 문화를 알린다면 분명히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취임 6개월째를 맞은 장형준(사진) 예술의전당 사장은 자신이 꿈꿔온 다양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중에서 2025년 2~3월께 신작 ‘한국형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겠다는 계획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한국적인 스토리를 토대로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에게 신작의 작곡을 위촉한 후 2025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다는 야심 찬 기획이다.
그는 1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K팝이나 드라마·영화 등 K콘텐츠 외에 클래식 문화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클래식 음악이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들리기 시작하면 한국을 보는 시각도 그저 돈만 많은 국가가 아닌 ‘문화 강국’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예술 분야에서 예술의전당이 갖는 무게감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표하기도 했다.
대담=박태준 문화부장
장 사장이 ‘한국형 오페라’에 열정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세계 속 한국 순수예술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고민에서다. 그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고민한 부분도 ‘세계화’였다. 직전까지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로 27년간 재직한 교육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예술의전당은 한 해 100번은 넘게 올 정도로 “너무나 훤히 아는 공간이자 학교 다음으로 자주 온 곳”이다. 그만큼 이곳이 한국 최고의 문화 공간이라는 위상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지만 조직의 수장으로서는 그 이상의 미래 비전과 계획이 필요했다. 그는 “예술의전당이 한국 최고에서 더 나아가 세계 무대에 보낼 수 있는 콘텐츠는 무엇일까 생각했다”면서 “결국 오페라·발레 등 순수예술의 활성화가 답이었다”고 말했다.
클래식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은 구조 조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전 지역에 오페라극장이 78곳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오페라극장은 현재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유일하다. 매년 공연하는 작품 횟수도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경우 연간 24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한 해 올라가는 오페라는 열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다. 발레 역시 사정이 비슷한데, 고정 팬이 두터워서 꾸준히 많은 관람객이 찾지만 높은 관람 욕구에 비해 공연 횟수는 많지 않다. 장 사장은 “이런 점을 볼 때 오페라와 발레가 활성화돼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형 오페라’ 제작에 나서게 됐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이 오랜 기간 해외에서 쌓아온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장 사장은 모두 1~2년 수준이 아니라 10~20년 넘게 쌓인 신뢰 관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며 “신작 오페라 작업도 30년의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작 오페라에 대해 “아무래도 한국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한국이 출발점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면서 “어떤 한국을 이야기할지는 기대해주셨으면 한다”고 귀띔했다.
장 사장이 이렇게 추진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솔리스트(솔로 연주자) 외에도 클래식계 전반에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을 만한 잠재력이 충만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을 위한 뒷받침이 부족했을 뿐이다. 지난달 장 사장 주도로 개최했던 ‘오페라 갈라’ 공연 이후로 우리의 클래식이나 오페라 등 순수예술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예술적으로도, 청중의 반응으로도 크게 성공적이었던 공연”이라며 “성악가들도 오페라극장에서 드디어 뭔가를 할 기회가 생기겠다는 생각에 용기백배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내에 좋은 청중도, 무대에 갈증을 느끼는 좋은 성악가들도 많다. 사장으로 있는 동안 청중의 기대치에 걸맞은 콘셉트와 프로덕션을 통해 그들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공연을 통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데뷔한 테너 백석종의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올해 영국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삼손과 데릴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두 편의 주역으로 잇따라 나서며 주목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장 사장은 백석종에 대해 “국내 최고 문화 예술 공간 예술의전당인 덕분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며 “해외에서는 이미 성공한 테너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선다는 이유로 큰맘 먹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청중과 성악가·무용수를 위해 오페라와 발레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그의 구상에 따라 2024년부터는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 등을 위한 장기 대관이 필요 없어지게 됐다. 장 사장은 “연간 4~5개월을 어떤 공연으로 메울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복안이 있었다”며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들면 전 세계에 있는 젊은 한국인 성악가들을 끌어내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 오페라 중심으로 콘텐츠를 채우기 어렵다는 얘기는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2024년 7월에는 국내 유명 성악가들의 독창회 시리즈를 준비하며 출연자들은 공연일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후진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다. 마스터클래스 참가자들에게는 장학금도 제공할 예정이다. 여름방학 가족 오페라로 ‘투란도트’ ‘마술피리’ 등 비교적 유명한 작품을 최상급 성악가들과 함께한다. 이 기간에 올릴 발레 라인업도 타진하고 있다. 계획대로 모두 진행할 경우 7월·8월은 다 채워진다. 다만 장 사장 역시 “이 시도가 성공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편 그가 ‘미래 사업’ 중 하나로 강조하는 영상 사업 역시 국내 클래식 음악가들을 세계 무대에 더 효과적으로 알리는 ‘세계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작은 유럽 최고의 클래식 음악 영상 제작사이자 방송 채널인 ‘유니텔’을 비롯한 전 세계의 클래식 음악 플랫폼에 영상을 배급하는 것이다.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서 한국의 오페라·발레·클래식 공연 등을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해외시장의 문을 먼저 열자는 취지다. 이미 공연 실황 영상의 녹화는 물론 실시간으로 송출할 수 있는 설비를 모든 공연장에 갖춰놓은 상태다. 촬영부터 편집, 후반 작업, 송출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한 종합 창작 시설인 ‘공연영상스튜디오 실감’도 5월 문을 열었다. 이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영상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며 이에 앞서 다음 달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리사이틀을 영상으로 만들 예정이다.
다만 인프라를 갖추는 일 외에도 만들어놓은 콘텐츠가 쌓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다소 시간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장 사장은 “제 의욕이 크고 시설도 좋을 뿐 아니라 훌륭한 아티스트도 있기에 콘텐츠는 쉽게 쌓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내년 기획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영상화를 신청 받았다. 공연에 앞서 일정을 조정해 스튜디오 ‘실감’이나 공연장에서 미리 영상을 찍는 등의 방식으로 공연과 영상 기획을 함께 가져갈 계획이다. 그는 “실내악으로 시작해서 챔버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은 물론 최종적으로 오페라까지 영상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내년은 예술의전당이 전관을 개관한 지 30주년 되는 해다. 장 사장은 예술의전당 내 총 10곳의 공연장 각각에 적절한 포지셔닝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미 콘서트홀은 관현악과 리사이틀 공연, IBK챔버홀은 실내악 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여기에 오페라극장을 순수예술 극장으로, CJ토월극장과 자유소극장은 태생 그대로 다양한 공연을 소화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음악당 내 100석가량의 소극장인 인춘아트홀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될 것”이라며 “젊은 아티스트들 중 좋은 연주자가 많은데 무대가 턱없이 모자라다. 그들을 다양한 기획 공연 형태로 매칭해서 초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He is…
△1962년 서울 △서울예고 △미국 맨해튼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 석사 △미국 맨해튼음악대학 피아노학 박사 △1995년 서울대 음악대학 피아노과 교수 △2005년 스코틀랜드 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예술감독 △2008년 서울대 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조직위원회 위원 △2012년 한국피아노듀오협회 회장 △클리블랜드, 더블린, 본 베토벤, 에네스쿠, 서울 국제, 에피날, 모스크바 등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 △2022년 6월~ 예술의전당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