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gender) 갈등은 스포츠다. 당장 온라인만 해도 젊은 남녀가 매일 편을 갈라 미워한다. 왜 싸울까. 뭘 해결해야 할까. 토론은 소용없다. 이해가 아니라 차이를 확인하려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포츠처럼 경쟁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다.
한국 사회는 수십 년간 여러 세대의 이대남과 이대녀를 키웠다. 그들은 오랫동안 오해와 갈등을 쌓아왔지만 본심은 뒤로 숨겼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색을 드러냈다.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성세대가 중재에 나섰다. 젊은이들의 유치한 사랑싸움 보듯 끼어들었다. 그러자 두 남녀가 꼰대를 노려봤다. 왜 싸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낄끼빠빠’ 역풍을 맞은 것이다. 어렵다. 이 시대의 젠더 갈등은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먼저 젠더란 무엇일까. 젠더는 사회문화적 성이다.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구별하는 성(sex)과 다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전통 규범이 정한 양식에 따라 결정되는 성이다. 그래서 기성세대 페미니즘은 이 질서를 무너뜨려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나아가 원한다면 자기 의지대로 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도 봤다.
하지만 이대녀도 똑같을까. 그렇지 않다. 이대녀는 ‘여성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초 커뮤니티는 개별적인 성폭력과 성차별의 경험담을 통해 공포를 실체화하고 공감하는 데 익숙하다. 여성안심주택·여성안심화장실·여성안심귀갓길·여성안심주차장 등 각종 보호 정책에 적극적이다. 또한 영미권 페미니즘은 차별 없이 모든 성이 사용 가능한 ‘성중립 화장실’을 요구하는데 한국의 이대녀는 ‘화장실 몰카 탐지기’를 요구한다. 이 공포는 여성의 피해자성을 강조한다. 때때로 과장되고 조작돼 역공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공포는 인간의 보수성을 자극한다. 공포에 기반하는 이대녀의 논리 형성 과정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보수주의에 가깝다.
이대남은 어떤가. 여성도 남성과 다를 게 없다면서 각종 성별 우대 혜택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남성은 결혼이나 병역에서 여성보다 더 큰 책임을 요구받는데 그것이 남성 차별적이라고 분노한다. 분노는 인간의 진보성을 자극한다. 결집하고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분노는 때때로 반사회적 폭력이나 조롱·협박으로 이어져 여초 커뮤니티의 표적이 된다. 이대남의 논리 형성 과정은 어쩌면 가장 성평등적이고 진보적인 세대같다.
이대녀는 안전을, 이대남은 공정을 원한다.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에 중재할 방법은 없다. 남녀 모두 만족하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다. 젠더 갈등은 서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키워 온 ‘한국 남자’와 ‘한국 여자’의 서로 다른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상을 잘 기록하고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해당 칼럼은 서울경제 1월11일자에 게재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의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