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시장 활성화·투명화·위작방지…잘 만든 물납제 '1거3득' 효과

[미술시장 1조시대, 성장허들을 치워라]

<중> 첫 단추 중요한 상속세 물납제

중요 미술품·문화재 국가 소유로

문화 향유권 제고 등 순기능 많아

이력정보·가치평가 '디테일' 중요

"문체부 심의·활용 방안 총괄해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연일 매진과 긴 대기줄로 화제를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경제 DB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연일 매진과 긴 대기줄로 화제를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경제 DB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타계와 이듬해 유족에 의해 이뤄진 이 회장 수집 문화재·미술품 2만 3000여 점의 기증은 여러 측면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다. 기증문화의 확산, 문화향유에 대한 국민적 욕구의 재발견 등이 있지만 ‘물납제’ 도입에 대한 여론형성이었다. 그 덕에 2021년 말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올해부터 상속받은 문화재와 미술품의 상속세액이 2000만원 이상일 경우 현금 대신 미술품·문화재로 물납이 가능하게 됐다.



일찍이 120년 전 물납제를 시행한 영국은 자국의 문화재·미술품이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았고, 프랑스는 2012년에 기존 물납제를 보완해 문화재·미술품을 기증할 경우 기부금으로 간주해 세액공제를 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도 물납제를 통해 중요한 문화재나 미술품이 상속세를 이유로 팔려가는 것을 방지하고, 우수한 유산을 국내 박물관·미술관에서 관람하며 문화 향유권을 높일 수 있다. 국립박물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예산이 40억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건희 컬렉션’ 같은 수준높은 유산 확보를 위해 물납제가 필요하다. 또한 미술품에 대한 금전적 가치를 제대로 매길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미술시장 발전에 기여하고, 미술품 소비·소장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산할 수 있는 순기능이 기대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국민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켰다. 동자상 뒤쪽으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이 보인다. /서울경제DB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국민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켰다. 동자상 뒤쪽으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이 보인다. /서울경제DB



하지만 물납제가 자리잡기에는 갈길이 멀다. 우선 11일 현재까지도 물납제 신청 사례는 한 건도 없다. 해당 상증세법의 시행령에 대한 대통령령이 발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 측 관계자는 “통과된 법안의 시행령은 대통령령으로 규정하도록 돼있어 현재 기획재정부가 상속세법에 대한 시행령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며 “(미술품·문화재의) 가치 평가 등에 대한 세부 규정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의견을 종합하면 2월말이나 늦어도 3월초에는 물납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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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가 중요하다. 세부 규칙이 잘 만들어질 경우 우리 문화재·미술계의 숙원인 시장 투명성 확보가 앞당겨질 수 있다. 물납제를 시행하는 프랑스는 해당 미술품을 누구로부터 얼마에 구입했는지 등에 대한 이력 정보를 물납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 불법으로 취득한 문화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인데, 암거래 시장을 없애고 거래 양성화를 불러오는 효과가 있다. 영국의 경우 물납 신청자가 해당 문화재나 미술품의 가치를 입증할 만한 관련 자료를 함께 제출하고, 이를 토대로 심의가 진행된다. 스스로 상속유물의 가치를 높여야 유리하기 때문에 자료 구비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미술투자에만 쏠리는 관심을 미술애호와 미술사적 배경지식으로 확장시키는 교육 기능이 물납제를 통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관람객들이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인 김환기의 푸른색 점화를 감상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간 구입예산이 40억원에 불과해 물납제나 기증 없이는 평균 40억원 이상인 김환기의 점화는 국가기관이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경제DB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관람객들이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인 김환기의 푸른색 점화를 감상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간 구입예산이 40억원에 불과해 물납제나 기증 없이는 평균 40억원 이상인 김환기의 점화는 국가기관이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경제DB


지난해 ‘문화재 및 미술품 물납제 관련 체계 연구’를 진행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변지혜 연구원은 “물납이라는 제도만으로 소장품에 대한 정보와 미술사적 의미를 명확하게 할 수 있고, 불투명한 시장거래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면서 “다만 프랑스나 영국의 방식을 도입할 경우 신청자들이 소장품에 대한 이력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시행 전 유예기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물납으로 받을 문화재·미술품에 대한 ‘심의’ 과정이다. 현행 물납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로 모두 이관돼 매각 또는 배치가 이뤄진다. 미술품·문화재 물납 경우는 현금화 해서 당장 국고를 채우는 게 목적이 아니다. 문화자산을 확보하고 국민 향유의 기회를 높여 경제강국에 이은 문화강국의 초석을 놓는다는 의미다. 영국은 브리티시 카운실(British Council) 산하에 물납 심의위원회를 두고 투명한 공채를 통해 전문 위원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대신 ‘연간 보고서(Annual report)’를 발간해 누구로부터 어떤 문화재·미술품을 물납받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공개한다.

오랫동안 물납제를 주장해 온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당장의 금전가치가 아닌 문화가치를 고려한 문화강국을 구상한다면 문체부가 주도적으로 물납제 심의기구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물납 대상을 문화재,미술품으로 나누기보다는 하나의 심의기구를 두고 산하 분과를 운영하는 식으로 체계적 운영을하고, 이를 통해 어떤 박물관·미술관에서 활용할지까지도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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