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허창수 회장과 권태신 부회장이 다음 달 임기 만료를 앞두고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국정농단 사태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입지가 줄어든 전경련이 새 회장 체제를 갖추고 현 정부 내에서 쇄신을 꾀하려는 취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허 회장은 지난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전경련 부회장단과 식사하며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차기 회장 후보 추천을 요청했다. 식사 자리에는 이웅열 코오롱(002020)그룹 명예회장과 조원태 한진(002320)그룹 회장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 부회장 역시 허 회장과 함께 사의를 표명힌 것으로 전해졌다. 허 회장과 권 부회장은 이날 전경련으로 출근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재계에서는 이번 허 회장의 퇴진을 매우 이례적인 결단으로 해석했다. 임기를 고작 한 달 앞두고 물러난 탓에 후임자 후보군을 이미 어느 정도 낙점해 둔 게 아니냐는 추정도 나왔다.
앞서 허 회장은 2011년부터 6회 연속으로 전경련 수장을 맡았다. 전경련 역사상 최장수 회장이다. 허 회장은 2017년, 2019년, 2021년 회장 교체기마다 연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쳤음에도 마땅한 후보가 없어 회장직을 계속 맡았다. 사단법인인 전경련은 회장 임기가 끝나는 해 2월 정기 총회를 열고 차기 회장을 추대한다.
한때 경제단체 맏형 역할을 맡았던 전경련은 국정농단 사태 직후 삼성, SK(034730), 현대차(005380), LG(003550) 등 국내 4대 그룹이 줄줄이 탈퇴하면서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주요 그룹 가운데에는 롯데, 한화(000880) 등만 회원사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현 정부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대한상공회의소보다 입지가 밀린다는 평가도 받는다.
더욱이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9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경제단체장을 불러 모으면서도 허 회장은 호출하지 않았다. 당시 자리에는 대한상의의 최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최진식 중견기업연합회 회장만 모였다. 같은 해 3월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가진 도시락 오찬 회동, 5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취임식과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대회 때만 해도 허 회장을 꾸준히 초청하다가 최근 분위기가 급변한 셈이다. 윤 대통령은 국정농단 수사 당시 특별검사팀 수사팀장을 맡아 전경련을 수사했던 경력이 있다. 허 회장은 이달 14일 윤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순방 경제사절단에도 개인 일정을 이유로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전경련 회원사 가운데에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허 회장의 후임으로 거론된다. 특히 김 회장의 경우 경륜과 재계 위상 등을 고려할 때 최적임자라는 평가가 많다. 김 회장은 이전에도 전경련 회장 교체기 때마다 하마평이 수차례 오르내린 인물이다. 신 회장의 경우 재계 순위는 가장 높으나 국정농단과 연루된 이력이 조직 쇄신 이미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이들 외에는 경총 손 회장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손 회장은 2005∼2013년 대한상의 회장도 맡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2002년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와 일본경영자단체연맹(닛카이렌)의 통합 사례처럼 전경련과 경총이 손 회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합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무역협회의 구 회장이 자리를 옮길 가능성도 있다. 다만 구 회장의 임기가 2024년 2월까지라는 점을 감안해 이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찮게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