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당국이 16일 일본에서 국장급 협의를 열고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 배상 해법을 논의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 개최한 공개토론회에서 제3자를 통한 대위변제 방안을 사실상 공식화했는데,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 없이는 정부 해법을 발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날 추가로 내놨다. 피해자 측이 한국 정부 해법에 일본 측 조치가 빠졌다며 강하게 반발한 데 대한 입장 표명으로 풀이된다.
외교부에 따르면 서민정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이날 오전 도쿄 외무성에서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과 만나 한일 외교국장급 협의를 진행했다. 이번 국장급 협의는 양국 정상 간 합의에 따라 조속한 현안 해결 및 관계 개선을 위해 외교당국 간 긴밀한 협의를 가속화해 나가는 차원에서 열렸다. 양 국장은 이 자리에서 양국 현안 및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서 국장은 이달 12일 징용 해법 관련 국회 공개토론회 개최 결과 등 국내 분위기를 후나코시 국장에게 전달했다. 앞서 외교부는 당시 토론회에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제3자인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피고기업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사실상 공식화한 바 있다. 이에 피해자 측은 앞서 정부 해법의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던 일본 피고기업의 배상 참여와 일본 측 사과를 재차 요구하며 반발했다.
외교부는 이날 협의에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보장돼야만 한국 정부가 해법을 발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협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서 국장이) 공개토론회 분위기 등에 대해 소상히 얘기하면서 다시 한 번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며 “일본의 호응 조치가 있어야 (정부 해법을) 발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일본 측으로부터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받은 뒤 한국 정부가 해법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국내 여론도 있고…”라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 해법을 발표함에 있어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담보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대일 관계에 강경한 국내 여론을 감안할 때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정부가 징용 해법을 내놓을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확실히 보장받은 뒤 해법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당국자는 “성의 있는 호응에 대해서는 실무자인 국장급에서 결정하기는 어렵다”며 “일본이 우리한테 딱 맞는 조치를 가져올지 이 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자국 기업이 재단에 기부하도록 하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지만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이 재단에 기부하는 것인지, 한국에 지사를 둔 또 다른 일본 기업이 기부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죄와 관련해서는 일본 정부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 과거 정부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힐 구상으로 전해졌다. 피해자 대리인 측도 일본 정부가 과거 입장을 다시 확인하는 것만으로 정부 해법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당국자는 정부가 해법을 내놓을 시기를 묻는 말에 “아직 양국 간 인식 차가 있다”며 “발표 시기를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르면 다음 달 개최 가능성이 거론되는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발표되면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는 길이고 당연히 셔틀외교도 (이뤄질 수 있다)”면서도 “정상 일정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모두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일본 측으로부터) 나오고 나서야 (가능하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은 정상이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국내 의견 수렴이 더 중요한 때”라며 “국내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 없이 정상 간 만남만 우선시하는 것은 정부가 피해자와 여론을 무시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만 몰두한다고 여겨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최 위원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국민의 이해를 얻으려는 정부의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일본 측의 보다 적극적인 태도와 노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