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르에 대한 기대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나뉠 것이다. 미래 과학 기술의 진보를 구현하기 위한 화려한 특수효과에 중점을 두는 이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을 수도,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 전달에 마음이 빼앗기는 사람이라면 여운이 남을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이 세계의 SF의 결은 후자다.
‘정이’의 배경은 2194년,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인류는 우주로 향한다.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에 인류가 살 수 있는 쉘터가 생기고, 수십 년에 걸쳐 90여 개의 쉘터로 시민들은 이주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쉘터가 스스로를 아드리안 자치국이라고 선언하며 지구와 다른 쉘터에 공격을 퍼부으며 몇십 년 동안 전쟁이 이어진다.
정이(김현주)는 내전에서 수많은 작전의 승리를 이끈 전설의 용병이다.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된 그는 35년이 지나 시대적 영웅이 됐다. 크로노이드 연구소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정이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전투 A.I.를 만드는 실험에 몰두한다. 중년이 된 정이의 딸 서현(강수연)은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으로 활동한다.
연 감독은 끊임없이 A.I.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이 A.I.는 인간이 아니지만, 복제 뇌를 통해 인간처럼 감정과 고통을 느낀다. 생김새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며 정이 A.I.를 폐기하는데 익숙하고 소모품처럼 생각한다. 서현은 다르다. 사람들에게 의중을 드러내지 않지만 A.I.와 어머니를 동일시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시청자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나뉜다. 작품이 모녀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장르의 모호함이 생기기 때문. 한국형 SF의 진화 단계가 어디까지인지 초점을 두는 SF 마니아라면 갸우뚱할 것이다.
연 감독 역시 그 지점을 충분히 고민했고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냈다. 연 감독의 표현에 따르자면 ‘멜로 감수성’이 작품에 바탕이 됐다. 남녀 간의 멜로가 아닌 캐릭터 간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다. 부정적 의미로 퇴색된 이른바 신파다. 즉, ‘정이’는 SF라는 장르에서 시작된 갈래라기보다, 멜로 감수성에 SF를 가미한 구조다.
그렇다고 SF적인 요소에 게으르지 않았다. 연 감독은 어릴 적 영감을 받았던 사이버 펑크 분위기로 작품을 아울렀다. 사실적인 CG 구현에도 힘써 볼거리도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이’만의 톤이 있다. 차가운 배경 속의 따뜻함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화룡점정이다. 연 감독이 작품의 중심으로 생각한 서현 역의 고 강수연 캐스팅은 갈수록 이해되는 대목이다. 강수연은 감정을 토해내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달한다.
김현주의 내공도 놀랍다. 연 감독과 함께한 ‘지옥’부터 이미지 변신에 도전한 그는 쉽지 않은 A.I. 연기를 수준급으로 소화했다. 악을 쓰며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이 자칫 작품 자체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으나 자연스럽게 승화했다.
정이 프로젝트 성공만 보고 질주하는 연구소장 상훈 역의 류경수는 다채로운 연기로 보는 재미를 더했다. 산만하고 직설적인 상훈은 작품의 신파 분위기 속 신선한 반전을 준다. 상훈이 등장할 때마다 극의 분위기가 유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