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여명] 한국 재계, 리더십이 안 보인다

[손철 시그널부장]

세계적 열풍 부는 '챗GPT'에 물으니

이재용·구광모만 직함 틀린채 거론

韓 재계 리더십 부재 보는듯해 씁쓸

'위대한 기업인' 향한 도전 많아져야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오픈AI의 인공지능(AI) 채팅로봇인 ‘챗GPT’에 궁금한 점이 생겨 9일 가입했다. 지난해 11월 탄생해 벌써 1억 명의 회원이 이용할 만큼 신통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출시 3개월이 되지 않아 한국어 서비스에는 오류가 적지 않은데 그래도 시험해봤다. 질문은 ‘한국 재계의 리더는 누구인가.’

챗GPT의 입장을 고려해 먼저 영어로 물었으나 답하지 못했다. 한국 기업과 기업인들에 대해 몇 가지 일반적 질문을 하니 삼성과 현대차·LG를 먼저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 LG그룹 사장(?)을 채팅창에 한국 재계의 리더로 올렸다. 표현을 바꿔 비슷한 질문을 수차례 더 했으나 대한상의 수장인 최태원 SK 회장이나 전경련을 이끄는 허창수 GS 명예회장은 찾지 못했다.



미국 명문 경영대학원에서 B학점 이상을 받는 챗GPT가 한국 기업 중 삼성과 현대차·LG 정도만 아는 것도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서 이재용 회장과 구광모 회장만 직함을 틀린 채 거론한 것은 한국 재계의 리더십 부재를 보는 듯해 씁쓸했다. 실제로 수십 년간 재계를 대표해온 전경련은 2021년 창립 60주년을 맞고도 차기 회장을 찾지 못해 허 회장이 6연임을 했고 최근 그의 사퇴로 새 회장을 찾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경제5단체 중 하나로 꼽히는 경총의 사정 역시 전경련과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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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 기업인들이 리더십 발휘에 소홀하거나 나서지 않는 데는 동양적인 ‘겸손의 미덕’이 한몫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치 권력에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소신과 비전을 명확히 밝히기를 꺼린다. 대통령이 종종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하는 가운데 해외 순방 등에 동행한 기업인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모습도 딱하지만 이해는 된다. 재판이 아직도 첩첩산중인 이재용 회장을 향해 수백만 개인투자자들이 과감한 주주환원 등 결단을 촉구하지만 메아리가 없는 것은 ‘혹시 또 수사 대상이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어서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이 윤석열 정부를 ‘검찰 정권’으로 또렷이 인식하는 데는 기업인도 마찬가지로 언제든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기업이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윤 대통령도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에는 기업인을 옥죄는 형벌 조항들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훨씬 많다. KT나 포스코·금융지주 회장들이 업계에서는 ‘소통령’과 맞먹는 힘과 영향력을 지녔지만 부당한 관치나 경영 개입에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는 것도 그런 질곡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적 특수성만을 방패로 삼아 기업인들의 리더십 실종 사태를 두둔할 수는 없다. 최근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소위 ‘대어’로 불리는 대기업들의 상장 시도가 자취를 감춘 데 대해 금융투자 업계는 최고경영자(CEO)나 오너가 웬만하면 위험을 피하고 보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삼성전자는 대규모 기업 인수합병(M&A)을 부르짖다 3년째 환경 탓만 하면서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이 됐고 SK와 LG·현대차는 우량 계열사들이 있어도 시장을 이끌기보다 누군가 먼저 나서 ‘불쏘시개’ 역할을 해주기만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챗GPT의 내공에 한계가 적잖아 최태원 회장이 사회적 기업 육성이나 기후위기 대응 등에서 선도적으로 어젠다를 발굴해 한국 기업이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것을 모르는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정주영·이병철처럼 창업주가 아니라면 ‘위대한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기기가 쉽지 않은 세태지만 기업인들이 이제 그런 도전조차 하지 않는 듯해 안타깝다.


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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