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과정에 세계 최대의 전략산업으로 부상한 반도체 분야에서 최근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삼성 반도체 부문의 2022년 4분기 영업이익이 불과 2700억 원이었던 반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만 TSMC는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무려 13조 3136억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1986년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이었던 필자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대만 산업 정책 세미나에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당시 대만 측 대표였던 챙소치에 중화연구소 소장은 개회사에서 반도체 산업에 도전장을 낸 이병철 삼성 회장의 ‘동물적 감각’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렇지 못한 대만 기업인들을 오히려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필자와 한국 대표단에 큰 충격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전문가들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갔고 이병철 회장의 ‘동물적 감각’은 크게 성공했는데, 이것이 삼성의 첫 번째 도약이었다.
2002년 서울에서 스탠퍼드대 동문회 주최로 하이테크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 이후 필자는 이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다. 공장 견학 후 오찬 자리에서 스탠퍼드대의 한 교수가 옆에 앉은 삼성의 젊은 중역에게 “삼성이 일본 소니를 따라잡은 비법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 중역은 “외환위기 이후 삼성은 열심히 구조 조정을 했는데 소니는 그렇지 않더라고요”라고 답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구상과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이의 적극적 실천이 삼성의 두 번째 도약이었던 것이다.
1986년 대만 방문 당시 한국 대표단은 신주과학단지를 방문했다. 정부 출연 연구소들만 모여 있는 한국의 대덕과학단지와는 달리 대만 정부가 젊은 기업인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자금 및 경영 지원을 통한 밴처 생태계를 1980년에 만들어준 것이 바로 신주과학단지다. 최근 반도체계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한 TSMC는 이 단지의 대표적 기업으로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 박사를 받고 IBM 부사장 등을 지낸 모리스 창에 의해 1987년 설립됐다. TSMC 설립 자본금은 대만 정부와 외국인 투자로 조달됐고 그 후 TSMC는 민영화돼 현재 대만 정부의 지분은 6.4%, 모리스 창 본인과 가족의 지분은 0.5%에 불과하다. 따라서 TSMC는 사실상 ‘국민 기업’이라고 할 수 있어 경영권 세습은 있을 수 없다.
TSMC와 삼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첫째, TSMC에는 지배적 소유주가 없기 때문에 경영권은 경영자 중 가장 능력 있는 자에게 승계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삼성과 같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최고경영자(CEO)가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는 일이 TSMC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TSMC는 창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를 경영 원칙으로 설정하면서 주문생산만 전담하는 파운드리 업체이기 때문에 반도체가 국가적 전략산업으로 부상한 현재의 상황에서도 미국 등 다른 선진국의 경계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메모리반도체 분야 세계 1위인 삼성은 휴대폰·PC 등 다양한 제품을 직접 생산하기 때문에 애플·인텔 등 주요 고객과 협력·경쟁 관계를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삼성이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해 세 번째 도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는 경영 패러다임을 개발해 이를 조기에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그 내용에는 경영 세습 관행에서 조속히 탈피하면서 현재 17%에 불과한 파운드리 분야 점유율을 제고하는 장단기 전략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반도체 산업이 국가 전략 분야로 부상한 새로운 국제 상황을 감안해 한국 정부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적극적 지원책을 마련해 이를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도약은 삼성 회장 주도로 삼성 스스로 이룩했으나 세 번째 도약은 이재용 회장과 삼성 자체의 노력에 더해 정부와 정치권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 성공 요건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