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스타 영화

[오영이] 성장물과 로맨스물 그 사이 '6번 칸'…상처 어루만지는 사랑 이야기

[리뷰] 8일 개봉작 '6번 칸'

제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고독을 마주하며 진동하는 인물의 정서

달리는 열차 속에 만나는 교류와 유대

오늘 영화는 이거! ‘오영이’




영화 '6번 칸' 스틸 / 사진=싸이더스 제공영화 '6번 칸' 스틸 / 사진=싸이더스 제공




영화 ‘6번 칸’(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떠나는 여자가 열차 6번 칸에서 이루는 성장을 담는다. 애인과 소원해진 상태의 주인공 라우라(세이디 할라)가 같은 칸에서 만난 남자 료하(유리 보리소프)와 나누는 대화를 줄기로 한다. 언뜻 열차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영화처럼 다가오지만, 두 사람의 대화로 구성된 극은 라우라가 지난 사랑을 내려놓는 여정도 함께 안는다.

‘6번 칸’ 속에는 이방인이 보인다. 명언 맞히기 놀이를 하는 문학 모임 사람들을 훑는 오프닝 시퀀스가 영화의 시작을 이끈다. 그들이 멋들어진 말을 늘어놓으며 예술에 대해 논하는 사이로 라우라가 홀로 서 있다. 그의 애인 이리나(디나라 드루카로바)는 라우라의 사람이기보다는 모임의 사람이다. 이리나는 유학생인 라우라의 러시아어 발음이 우스꽝스러움을 꼬집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는다. 라우라는 사랑이 끝났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지만 차마 관계를 매듭짓기 어렵다.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가 라우라에게 아직 소중하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스스로를 마주할 수 없다. 흔들리는 라우라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백 팔로우 숏을 위주로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라우라의 외로운 마음이 다가온다.



캠코더는 인물이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비유의 소품이다. 라우라는 여정의 시작에서 같은 칸 안의 건너편 공간을 캠코더로 찍으며 이리나의 빈자리를 더듬는다. 사랑하던 시절에 함께 여행하기로 약속했던 추억을 그리는 가운데로 낯선 남자만이 불쑥 들어올 뿐이다. 료하가 공간의 여백을 채우면 라우라는 서둘러 캠코더를 접어 숨긴다. 마음을 나눌 구석이 없어 보이는 상대에게 캠코더를 들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 내면엔 작은 동물이 살아, 너를 위해 건배하자.” 낯선 노파가 건네는 말은 라우라의 혼란을 어루만진다. 중요한 지점인 노파와의 만남 시퀀스 내내 라우라의 캠코더 렌즈가 닫힌 채다. 내면의 동물을 위해 건배하자는 할머니의 대사에는 그를 듣는 각자가 내면의 결을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6번 칸’의 열차 밖 만남은 인물이 스스로의 마음의 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라우라는 캠코더를 내려놓고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온전한 눈을 키운다.



근사한 매력을 지닌 제삼의 인물 핀란드 남자는 라우라가 온정을 나누기 쉬운 상대다. 같은 핀란드 사람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향취도 갖춘 것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라우라는 금세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다. 세 사람이 모인 6번 칸에서는 의외로 귀여운 경계심을 비추는 료하가 돋보인다. 한정된 공간과 구조를 가진 영화가 캐릭터를 영리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러한 캐릭터의 활용을 통해 영화가 은유적인 스토리텔링을 이끌어간다. 예술적인 기타리스트 남자가 퇴장할 때 라우라의 캠코더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핀란드 남자와의 에피소드는 사랑의 동력이 깊숙한 데에 있음을 담담히 일러준다. 멋쟁이 예술가 남자를 뒤로 한 차창 밖으로, 선로 위에는 핸드백을 우스꽝스럽게 허리춤에 끼고서 추태를 부리는 료하가 보인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잃은 건 절망스러운 일이지만 라우라는 비로소 미련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



“이리나가 많이 그리울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리나가 날 바라봐 주는 눈빛이 그리워요.” 라우라에게서 캠코더가 사라지고 나면 그가 실로 그리워하는 정체가 또렷해진다. 이때 영화에서는 쉼 없이 그저 내달리는 열차의 특성이 부각된다. 아무도 어찌할 도리 없이 계속해서 달리는 열차로부터 공간적 배경의 일방성이 만들어진다. 이 일방향성이라는 소재의 요소가 오히려 라우라를 홀로 서 있을 수 있게 지탱한다. 라우라는 성장의 여정을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라우라가 지난 연인과 모스크바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말하는 인물을 비추거나 지난 과거의 플래시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열차가 지나오는 길을 보여주는 선로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바깥으로, 라우라의 목소리가 덧입혀 들려온다. 제시되는 풍경을 따라 열차의 방향에 몸을 맡기면 과거를 떠나보내는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게 하는 영화적 장치다.



때로는 수동적으로 맞이하거나 털어내게 되는 일도 있음을 ‘6번 칸’ 속 라우라가 배운다. 라우라가 료하와 만나서 마음을 나누게 되는 계기와, 이후 이어지는 탐험의 여정이 모두 라우라에게 ‘벌어지는’ 전개 양상이다. 인물이 사건을 직접 일구어 나가기보다는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맞닥뜨리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러나 전개 과정에서 사건을 겪고 골똘히 생각하는 인물의 성장은 지극히 진취적이다.

“너를 위해 건배하자”라는 노파의 말과 “그냥 건배”라는 료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잔을 들었던 라우라는 이제 자신만의 건배를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라우라는 계속해서 외롭겠지만, 사람을 통해 치유하고 또다시 홀로 세상을 나서는 법을 6번 칸 안에서 배웠다. 영화는 이렇게 사랑을 대하는 본질적인 마음을 다룬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이 피어남에 있어서 주고받는 상처와 위로는 교묘하게 교차한다. 도둑 맞은 캠코더를 잊어버리고 나자 꿈에 그리던 암각화를 직접 두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라우라처럼.

+요약


제목 : 6번 칸(Compartment No.6)

장르 : 멜로/로맨스, 드라마

연출 : 유호 쿠오스마넨

출연 : 세이디 하를라, 유리 보리소프

배급 : 싸이더스

상영시간 : 107분

상영등급 : 15세 관람가





개봉 : 2023년 3월 8일


조은빛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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