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더 글로리, 참고 또 참았던 시간을 애도하며


얼마 전 심리상담 전문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제 여울씨의 지난 날들을 애도해 보세요. 혼자 견디기에 버거운 수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 말이 왜 그토록 서글펐을까.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스스로의 삶을 애도해야 함을 깨닫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도라는 말에는 단절의 의미가 들어 있다. 힘겨웠던 그 시간을 견뎌온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다. 만약 그 많은 짐을 다 짊어지고 살아온 당신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었다면 전혀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대단하다는 칭찬에는 그 시간의 소유주는 여전히 ‘나’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과거로부터 나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나는 고통스러운 과거와 작별하는 제의적 몸짓으로서 ‘지난날의 나’를 처절히 애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애도는 죽은 대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나를 죽여야 할 때도 애도가 필요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처럼. 학대와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를 결코 잊지 않으면서도, 이제부터 ‘찢기고 짓밟힌 나’가 아닌 다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용기를 얻기 위하여.

관련기사



김은숙 작가가 창조한 이 잔혹한 복수극의 세계가 전세계인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작품이 ‘용서’라는 말에 숨은 포기와 비겁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잘못을 결코 용서할 수 없는데도, 지금의 내가 그저 간신히 살아남기 위해 표피적인 용서를 택해왔던 수많은 나날들.

그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문동은의 철두철미한 복수의 시나리오다. 세상 누구도 날 구해주지 않는다 믿었던 문동은은 처절한 복수의 시나리오를 빠짐없이 다 실현하고서야 자신을 줄기차게 응원하던 낯선 타인의 친절이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깨닫는다. 지금은 추우니까, 나중에 더 따뜻할 때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애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언젠가는 활짝 피어나는 봄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줄기차게 싸워왔던 나는 어느 날 깨달았다.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이제는 내가 훨씬 강해졌음을.

세상 모든 ‘동은이’들이여. 제발 포기하지 말고, 제발 홀로 슬퍼하지 말고, 부디 당신의 활짝 필 봄날을 응원해줄 강현남을, 에덴빌라 집주인을, 칼춤까지 쳐 줄 사랑스러운 망나니 주여정을 찾기를. 그리고 그 모두가 없을지라도, ‘나를 위해 망나니 춤을 추어줄 나 자신’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기를.

내가 나의 주여정이 될 때, 내가 나의 문동은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기필코 승리하는 눈부신 복수극의 주인공이 된다.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은 것 같았던 시간들로부터 나 자신을 구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과거를 애도하는 새로운 길이 아닐까.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