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드라이브에 반발해 야권이 제출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하원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 법안은 이제 의회 통과의 효력을 갖게 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연금 개혁안이 무효가 되고 내각이 사퇴 위기에 내몰리는 상황은 모면했으나 표결 결과 하원 내 만만찮은 반대 세력의 존재가 확인돼 향후 정국 운영에 부담을 안게 됐다.
하원이 20일(현지시간) 오후 표결에 부친 첫 번째 불신임안에는 278명이 찬성해 과반에 미치지 못해 부결됐다. 하원 전체 의석은 577석이지만 현재 4석이 공석이라 불신임안을 가결하려면 의원 287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이 불신임안은 야당에서 자유·무소속·해외영토(LIOT) 그룹과 좌파 연합 뉘프(NUPES)가 함께 발의한 것이다.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이 별도로 발의한 불신임안도 표결 결과 94명의 찬성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집권당이 하원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모든 야당이 찬성했으면 가결할 수 있었으나 우파 공화당이 함께하지 않았다. 올리비에 마를렉스 공화당 하원 대표는 이날 하원에서 "우리의 연금 제도를 구제하고, 은퇴자의 구매력을 보호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화당이 사실상 당론으로 불신임안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표결 결과를 볼 때 이에 반한 결정을 내린 의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보른 총리가 이끄는 내각은 살아남았지만, 겨우 9표 차이로 부결된 만큼 앞으로 하원을 설득하는 일이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야당은 보른 총리가 하원 표결을 생략하고 연금 개혁 법안을 입법하는 헌법 제49조3항을 사용하자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정부는 이 조항에 따라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 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다. 지난해 5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시작과 함께 취임한 보른 총리는 이 조항을 지금까지 11번째 사용했다. 여기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내각 불신임안을 발의할 수 있다. 과반수 찬성을 얻는다면 법안은 취소되고, 총리 등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
하지만 보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 법안은 이제 의회를 통과한 효력을 갖게 된다.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 법안은 상원을 통과했지만, 하원을 통과하지 못해 상원과 하원은 양원 동수 위원회를 꾸려 최종안을 도출했다.
양원 동수 위원회가 도출한 최종안에는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점진적으로 64세로 연장한다는 정부가 제출한 원안이 반영됐다.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늘린다는 내용도 그대로 담겼다.
근로 기간을 늘리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을 최저 임금의 85%로 10%포인트 인상한다는 조항도 유지됐다. 노동시장에 일찍 진입하면 조기 퇴직을 할 수 있고, '워킹맘'에게 최대 5% 연금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공화당의 제안들도 포함됐다.
이 법안은 이제 한국의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보른 총리는 헌법위원회에 가능한 한 빨리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하원에서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가결과 동시에 연금 개혁 법안이 통과되자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마크롱 사퇴"와 같은 구호를 외쳤고, 쓰레기 수거업체 파업으로 길가에 쌓인 쓰레기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시위는 비교적 평화롭게 마무리됐지만, 경찰은 파리에서만 70명을 체포했다고 BFM 방송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