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정책·제도

[이사람] "30년 제자리 건축사 처우 개선…건축의 공공기여 길 넓힐 것"

■'건축사, 협회 의무가입' 이끌어낸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장

최저임금 8배 오를때 설계비는 그대로

의뢰 받고 일해도 선택 안되면 '무임금'

젊은 건축사들 잇단 좌절에 이탈 가속

협회 통해 흩어져있던 의견 하나로 모아

민간발주 합리적 대가 기준 마련하고

美 AIA처럼 건축사단체 위상·소통 강화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




“건축사로 건축 업계에 발을 들여놨지만 외국보다 건축사의 위상이 떨어진다는 점, 후배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건축사협회에서 일을 시작했고 지난 5년간 대한건축사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건축사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주력했습니다. 최대 성과는 건축사들의 협회 의무 가입 법 통과를 이끌어낸 것인데 눈물로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너무 힘든 여정이었죠.”



올해로 임기 6년차를 맞은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은 지난해 건축 업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건축사들의 대한건축사협회 의무 가입을 골자로 한 건축사법 개정을 이뤄낸 것이다. 협회 의무 가입 제도가 부활한 것은 2000년 이후 22년 만이다. 건축사 업계에는 여러 단체들이 있지만 대한건축사협회가 국가에서 인정한 유일한 법정 단체이며 건축사들은 이 협회에 의무 가입해야 한다. 최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석 회장은 “그동안 건축사들은 파편화된 형태로 흩어져 단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좋은 건축으로 공공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도외시한 채 각자 밥벌이에만 신경썼다”며 “의무 가입을 통해 모든 건축사들이 공통된 윤리와 규범 아래 업무를 보면 공공에 더 질 좋은 건축물을 공급할 수 있고 건축사들의 처우와 위상도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


석 회장이 건축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어릴 적 우연히 봤던 할리우드 영화였다. 1930~1940년대 최고의 배우였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건축사로 나온 영화를 보고 건축의 매력에 푹 빠졌다. 혼자 고민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건축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국내 유수의 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해 건축사 면허를 따고 독립을 해 회사를 차렸다.

사회에 의욕적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점점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웠다고 한다.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건축물을 설계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무실 운영에 더 치중했다. 한 발짝 떨어져 건축사들과 업계를 지켜보니 아쉬운 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후배들이 일하는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것이었다.

“제가 한창 일할 때는 1980년대 개발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로 설계 발주가 넘쳐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편하게 일감을 따내고 업무를 했는데 후배들은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저희 때보다 공부의 양은 10배나 많은 데다 힘들게 자격증을 땄는데 맘껏 일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하는 점이 보였습니다.” 건축사들의 여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건축사협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직을 거쳐 2018년 대한건축사협회 회장에 당선, 2021년에는 55년 협회 역사상 처음으로 연임까지 성공했다.



그가 협회장으로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건축사들의 자존감과 위상을 세우는 일이었다. 일한 만큼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하는 풍토가 만연하면서 ‘좋은 건축물로 사회에 기여하자’는 건축사들의 직업 의식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실제로 현재 민간 건축물의 설계 대가는 1990년대 수준이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최저임금이 같은 기간 8배나 상승했지만 설계비는 30여 년 전과 동일하다. 석 회장은 “만약 건축주가 A라는 건축사가 제시한 설계가 마음에 안 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곳에 설계를 의뢰해야 하는데 현재는 A·B·C 등 복수의 건축사에 설계를 의뢰한 뒤 최종 선택한 곳에만 대가를 지불한다”며 “이런 구조 때문에 젊은 건축사들은 굉장한 좌절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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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오승현 기자


이에 그는 건축사들이 공통의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협회 의무 가입 법 개정을 추진한 이유다. 수많은 국회의원들을 만나 법안 취지를 설명하고 의무 가입에 동의를 하지 않는 건축사들을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마침내 지난해 2월 법이 통과돼 건축사들은 올 8월 3일까지 대한건축사협회에 의무적으로 가입을 해야 한다.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는 미가입 건축사가 5000여 명 정도인데 현재 가입률은 20%선에 머무르고 있다.

석 회장은 의무 가입 법안 통과가 ‘겨우 문지방에 도달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제는 건축사 업무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에 더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대표적인 게 민간 건축 설계에 대한 합리적인 대가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설계 물량의 약 20%인 공공 건축은 ‘공공 발주 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 범위와 대가 기준’에 따라 적정 대가 지급이 의무화돼 있지만 민간 발주 사업은 그렇지 못하다. 덤핑 수임과 최저가 낙찰 관행이 지속돼 건축사들은 취약한 노동 환경에 노출돼 있고 이는 건축 전공 졸업생들의 인력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또 이러한 저가 설계는 부실 설계로 이어져 시공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석 회장은 “건축 설계 분야는 공공보다 민간 시장이 큰 만큼 민간 대가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분리 발주되는 부문 관리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요구할 계획이다. 건축물을 구성하는 전기·소방·통신 등은 현재 분리 발주되고 있는데 건축사는 이 모든 분야를 통합·관리한다. 이들은 완벽한 건축 설계를 위해 다른 분야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에너지를 쏟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석 회장은 건축사들이 분리 발주되는 분야에 대한 통솔의 대가(최소 분야별 용역비의 10% 이상)를 받지 못한다면 통합·관리 업무를 하지 말도록 지도할 방침이다. 또 분리 발주된 분야에 기인한 사고에 대한 면책 법안도 추진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대한건축사협회를 미국 건축가협회(AIA)와 같은 위상을 가진 단체로 격상시키는 게 목표다. 그는 “AIA는 미국 건축 전문가들의 집단으로 국가 건축 관련 법이나 정책에 깊이 관여하면서 업계 규제 완화와 건축 전문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전방위로 노력한다”며 “대한건축사협회도 건축사들의 의무 가입으로 확보한 단체협상권과 단체행동권이라는 새로운 권한을 가지고 국가 건축 정책 동반자로의 역할을 하기 위해 더욱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건축사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은 필요하지만 대외적으로 협회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무 가입까지 이뤄낸 만큼 통합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다른 건축사 단체와의 소통도 강화할 것입니다.”

He is… △1956년 서울 △1978년 연세대 건축공학과 △1985년~ ㈜태건축설계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2015~2017년 대한건축사협회 부회장 △2015~2017년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 국제건축연맹(UIA) 2017서울세계건축대회 조직위원장 △2018년~ 국토교통부 중앙건축위원회 위원 △2018년~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한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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