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자녀가 채무 등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에게 상속이 대물림되지 않고 고인의 배우자만 단독상속인이 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숨진 A 씨의 손자녀 4명이 채권자 B 회사를 상대로 낸 승계집행문 부여에 대한 이의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에 돌려보냈다.
A 씨는 배우자와 4명의 자녀, 손자녀를 남기고 2015년 사망했다. 이에 A 씨의 배우자는 A 씨가 남긴 재산 한도 내에서 채무를 갚는 조건으로 상속받는 ‘상속 한정승인’을 했고 자녀들은 모두 상속을 포기했다. 고인이 재산보다 많은 채무를 남긴 경우 남은 유족이 빚을 떠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우자가 상속 한정승인을 하고 자녀들은 상속을 포기한 사례다.
그런데 2011년 A 씨에게 받아야 할 구상금이 남아 있던 B 회사가 A 씨의 손자녀들에게 지위를 승계시킨다는 취지의 승계집행문을 부여받고 이를 청구했다. 대법원이 고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모두가 상속을 포기하면 자동으로 고인의 배우자와 손자녀가 공동상속인이 된다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빚을 떠안게 된 A 씨의 손자녀들은 이 같은 처분에 불복해 이의를 신청했다가 기각되자 항고했다.
이날 대법관 다수는 종전 판례와 달리 고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가 있더라도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되고 손자녀는 상속인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민법에서는 공동상속인 중 어느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하면 그 사람의 상속분이 ‘다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고 정한다”며 “이때 ‘다른 상속인’에는 배우자가 포함되기 때문에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하면 그 상속분은 배우자에게 속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동원·노태악 대법관은 “종전 판례가 우리 법 체계와 사회 일반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다”며 “민법상 손자녀는 자녀보다 후순위 상속인이지만 자녀나 손자녀 모두 배우자와는 같은 순위”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가사 전문 법관 출신인 이현곤 세올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당연히 채무 관계가 끝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성년 손주들에게 상속돼 더 큰 피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며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그게 손주에게까지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 판결에서 명확히 정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