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조금 급히 먹었는지 속이 계속 더부룩해요.”
“혹시 윗배·아랫배 중 어느 부위가 더 불편하세요? 설사는 안 하셨고요?”
30일 오후 10시 50분 서울시 동작구에 위치한 약국 앞에 설치된 화상투약기를 찾았다. 지난해 6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대한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제22차 신기술·서비스심의위원회 회의에서 규제특례 승인을 받았던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원격 화상투약기)’다. 기계 전면에 모니터와 음성 송수신 장비가 장착돼 약국이 문을 닫은 늦은 밤이나 주말·공휴일에 환자가 모니터를 통해 증상을 말하면 약사가 원격으로 약을 추천해주는 방식이다. 이날 밤 10시부터 서울·경기·인천 소재 약국에 설치된 7대가 가동을 시작하며 시범사업의 첫발을 뗐다.
점심을 빵으로 대충 때운 탓일까. 허겁지겁 저녁 식사를 마친 뒤부터 체기가 올라왔던 터라 약사의 상담을 받기로 마음 먹고 기계 앞에 섰다. 현재 서울에서 유일하게 화상투약기를 운영 중인 약국은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의 대로변에 있다. 기계 전면에 환하게 켜져 있는 모니터에는 ‘365일 약사 상담 시스템 원격 화상투약기. 약국 폐문 시간에도 약사가 직접 상담해 투약해 주는 서비스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대형 편의점이 있는데, 안전상비약을 구매하는 게 더 편리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의 안내에 따라 신용카드를 꽂고 ‘복약 상담 연결 중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며 10초 정도 대기하니 상담 약사가 등장했다. 화면 너머에 헤드셋을 착용한 약사와의 대화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자연스러웠다. 화면 하단에 상담 약사의 이름과 면허증이 함께 제시돼 한결 신뢰감이 느껴졌다. 오히려 평소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때보다 약사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증세에 맞는 약을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10여 초 지나 다시 화면에 등장한 약사는 상복부의 불편감과 체함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일반의약품 두 가지를 추천했다. 각각 2정, 1정씩 물과 함께 복용하면 된다고 안내한 뒤 구매 의사를 물었고 결제를 완료하자 기계 아래로 2개의 제품이 나왔다. 상담 약사는 추천한 제품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카메라에 약을 비춰 달라고 요청했다. “약을 먹어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거나 다른 증세가 나타나면 꼭 병원을 찾으라”는 당부와 함께 상담을 마쳤다. 약을 받아 들고 돌아서니 어느새 대기줄이 길게 형성돼 있었다. 뒤이어 상담에 나선 젊은 남성은 ‘목이 아픈 여자친구를 위해 약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약사 출신인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가 2012년 개발한 화상투약기는 약국 이외의 장소에서 약사의 의약품 판매를 금지하는 현행 약사법에 가로막혀 시범사업이 시작하기까지 11년이 걸렸다. 2013년 인천 부평과 2021년 경기 용인 소재 약국 앞에 설치된 적이 있었지만 지역약사회의 반발로 철거됐고 약사법 개정 시도도 불발됐다. 쓰리알코리아 화상투약기는 규제 샌드박스 특별법이 시행된 2019년 실증특례를 신청한 지 3년 만에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심의위원회 회의에 올랐다. 어렵게 조건부 승인을 받고도 과기정통부와 보건복지부의 현장 실사, KC 인증 등의 절차를 밟느라 9개월을 꼬박 채운 끝에 실제 운영에 돌입한 상황이다.
규제샌드박스심의위는 지난해 승인 당시 화상투약기에서 취급 가능한 일반의약품을 △해열·진통소염제 △진경제 △안과용제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정장제 △하제 △제산제 △진토제 △화농성 질환용제 △진통·진양·수렴·소염제 등 11개 효능군으로 제한했다. 의사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일반의약품 48개 외에 진단시약·숙취해소제 등도 구매 가능한데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해 환자는 선택권이 없고 약사가 골라준 약만 구매할 수 있다. 3개월 동안 수도권 소재 약국 10곳에서 시범 운영한 후 확대 여부가 결정되면 2년간 최대 1000대까지 화상투약기의 설치 및 운영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