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계열 향수를 구매한 고객이 가장 많이 구매한 팬츠는 밑단이 넓고, 색상은 진청이에요, 이런 디자인 어떠세요?" 백화점 직원의 흔한 영업 멘트가 아니다. 삼성물산(028260) 패션이 개발한 자체 인공지능(AI) 큐레이션이 고객 행동 패턴을 분석해 옷을 추천해주는 방식이다. 국내 패션업체들이 디지털 고도화에 나서고 있다. 계절, 성별, 연령대에 맞춰 일상적으로 옷을 만들던 공식이 깨지며 고객 맞춤형, 즉 개인화에 집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골칫거리인 재고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9일 삼성물산 패션에 따르면 SSF샵에서 AI 큐레이션을 통한 매출 비중은 지난해 10%에 육박했다. 최종적으로는 30%까지 높이는 게 사측 목표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AI를 통한 매출 비중이 30%가량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 상승 추세는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삼성물산 패션은 2017년부터 자체 AI 기술을 개발해왔다. 패션 전문가가 만든 스타일링 조합을 AI 큐레이터가 학습해 30여 만 개의 상품을 고객에 맞춰 추천해준다. 단순 나이와 성별 뿐 아니라 공식몰에서 향수와 조명 등을 판매해 얻은 취향까지 아우르는 게 특징이다. 조종현 삼성물산 기술기획팀장은 "AI뿐 아니라 가상화 기술과 챗GPT 등을 통해 큐레이션 매출 비중을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031430)은 AI 기술을 활용, 장바구니 속 잠자는 상품을 분석해 고객에게 새 상품을 추천해준다. 이를 위해 지난해 공식몰인 에스아이빌리지를 AI 기반 초개인화 중심으로 개편했다. 그 결과 상품 클릭이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구매전환율은 개편 이전보다 2배 증가했고, 사이트에 머무는 체류 시간도 평균 15%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LF(093050)의 '마이 사이즈'는 애플리케이션(앱)에 몸무게와 키, 어깨 너비 등 정보를 입력하면 유사한 체형의 고객이 가장 많이 선택한 사이즈를 추천해준다. 옷마다 실측 크기가 달라 특정 상품은 S 사이즈를 구매하더라도, 다른 상품은 M 사이즈를 선택해야 하는 불편에서 착안했다. 여기에 AI가 '사이즈가 맞다'고 남긴 고객 리뷰를 학습해 정교함을 더했다. 지난달 마이 사이즈의 이용자 수는 도입 첫 달인 지난 2월 대비 10% 증가했다. 무엇보다 반품률을 줄일 수 있어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은 재고 관리와도 맞닿아있다. 수요가 집중되는 사이즈와 색상을 주력으로 생산하고, 반품을 줄임으로써 과재고 현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패션업체들의 재고 자산은 크게 증가한 상태다. 지난해 말 기준 한섬(020000)의 재고자산은 5627억 원으로 전년 대비 22% 증가했다. 같은 기간 LF와 신세계인터내셔날도 각각 42%, 15% 늘었다. 원단부터 단추까지 각종 원부자잿값이 오르자 올해 가을·겨울(FW)시즌 일부 물량을 지난해 생산하는 등 일정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나이키 역시 2019년 재고 관리 AI 시스템인 '셀렉트'를 인수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디지털 고도화는 구매 적중률을 높여 소비자들의 의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ESG 경영에 포함돼 앞으로도 투자를 확대할 대표적인 분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