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방지법(IRA)에 테슬라가 촉발한 가격 인하 경쟁까지 더해지며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공략 중인 현대차(005380)그룹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2032년까지 신차의 67%를 전기차로 생산하도록 하는 미국 정부의 계획을 놓고 자동차 업계는 설비투자까지 강제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내놓고 있다. IRA에 가격경쟁, 그리고 설비투자까지 늘려야 하는 현대차는 이중 삼중의 압박감을 받는 실정이다.
10년 내 전기차 판매 비중 67%…“부담가는 수치”
1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 환경보호청(EPA)이 공개한 ‘승용차 및 소형트럭 탄소 배출 규제안’이 시행되면 완성차 제조사는 사실상 2032년까지 판매하는 신차 중 3분의 2를 전기차로 채워야 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 중 전기차의 비중은 5.8%에 불과하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000270)의 전기차 판매 비중도 3.9%에 그치고 있다. 두 회사가 전동화 전환에 속도를 내고 미국 현지 공장에서 전기차 생산도 시작한 상황이지만 10년 이내에 전기차 판매 비중을 67%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대차는 2030년 미국에서 전체 판매의 58%를 전기차로 채울 계획을 갖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규제안이 나오는지 지켜봐야겠지만 67%라는 목표치는 국내 자동차 업계의 미국 현지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수치”라고 말했다.
가격 20% 낮춘 테슬라…美·中 업계도 동참
현대차가 부닥친 난관은 이 뿐 아니다. 테슬라는 올 들어 미국과 중국에서 모델3·모델Y 등 주요 차종의 가격을 최대 20%까지 내렸다. 미국에선 보급형 차종인 모델3의 가격이 올해 초까지만 해도 6만 2990달러였지만 현재는 5만 2990달러까지 낮아졌다. 세 달 만에 가격을 1만 달러(약 1000만 원)나 낮춘 셈이다.
가격 인하 전략은 효과를 거뒀다. 테슬라의 올해 1분기 글로벌 판매량은 42만 2875대로 지난해 1분기보다 36% 급증했다. 분기 판매량으로 역대 최대 기록이다.
테슬라에 자극 받은 경쟁사도 가격 인하에 동참했다. 포드는 미국에서 머스탱 마하-E의 가격을 8% 낮췄고 제너럴모터스(GM)는 하반기에 출시할 이쿼녹스EV의 가격을 3만 달러(약 4000만 원) 수준으로 낮춰 책정할 계획이다. 중국 토종 전기차 기업 비야디(BYD)도 전기 세단 씰을 비롯한 주력 모델의 현지 판매 가격을 인하하며 테슬라에 맞불을 놨다.
판매 영향 미친 IRA·가격 경쟁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IRA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완성차 업계의 가격 인하 치킨게임이 더해지면서 현대차그룹 입장에선 가격 경쟁력이 약화할 변수가 추가됐다. IRA와 가격 인하 경쟁의 여파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1분기 미국에서 38만 대를 판매하며 역대 최다 실적을 달성했지만 전기차 판매량은 소폭 줄었다. 현대차 아이오닉5의 지난달 판매량은 2114대에 그치며 전년 대비 22%나 감소했다.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것도 문제다. 미 조지아주에 설립 중인 전기차 전용 공장이 가동하면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2025년에야 완공된다. 현대차그룹은 앨라배마 공장에서 제네시스 GV70 전기차를 생산해 보조금을 받을 계획이었지만 배터리 세부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며 GV70도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제 값 받기 유지한다지만…대응 한계 불가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차그룹이 세운 ‘제 값 받기’ 전략도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일단 현대차그룹은 무리한 가격 인하에 동참하지 않고 수익성을 고려한 제 값 받기 정책을 유지할 계획이다. 북미 생산 요건에 관계없이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리스 사업을 확대하는 식으로 정공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친환경차 판매에서 리스·렌털이 차지하는 비중을 지난해 5%에서 지난달 27%까지 높였다.
다만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장려금 등 인센티브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면서 “결국 투자나 생산확대 등의 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