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의 분쟁 합의안 도출이 급물살을 탄 것은 이달 말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간 갈등 현안을 서둘러 조율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전과 같은 전략산업 분야에서 엇박자가 날 경우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두 나라 관계의 격상을 준비해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큰 그림에 오점이 될 수 있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 본격적인 분쟁은 체코 두코바니 원전 사업 입찰 직전이던 지난해 10월 불거졌다. 한수원이 체코에 수출하려는 원전 노형은 APR1400으로 미국 원전 업체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의 ‘시스템80플러스’를 바탕으로 설계됐다. 한수원은 1997년에 CE와 기술 사용 계약을 맺었으나 웨스팅하우스가 CE를 2000년에 인수하면서 소유권 논란의 불씨를 낳았다. 이후 한수원이 원자력 분야의 3대 원천 기술인 △원자로냉각재펌프(RCP)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 △원전 설계 핵심 코드를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모두 국산화하면서 독자적인 원전 수출을 위한 걸림돌을 치웠다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지분을 인정하는 이번 합의안에 잠정 합의한 것은 양측이 협력하기를 희망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에너지부는 양 사 간 분쟁 자체보다 전 세계의 핵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비교적 통제가 가능한 웨스팅하우스가 한수원과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같은 미국 정부의 입장을 감안해 양 사가 이번 합의안에 잠정 합의하고 소송을 마무리 짓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당국자도 13일(현지 시간)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돌파구가 마련되도록 논의하고 있다”며 “해당 소송이 국제시장에 (한미가) 공동으로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돼왔다”고 말했다. 이 고위 당국자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양국이 같이 수익을 올리고, 글로벌 시장에서 윈윈 게임을 하는 방향으로 집중해 협의하고 있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막바지 논의를 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특히 이 당국자는 이달 말 한미정상회담 이전에 양 사가 갈등 해법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도 전했다.
일각에서는 한수원이 승소 가능성이 적지 않은 소송에서 사실상 양보한 게 아쉽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라는 한미 원전 대표 기업 간 갈등이 국가 간 문제로 비화되는 것에 우리 정부나 한수원이 더 부담을 느끼는 구조적 한계가 작용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특히 한수원이 한미 관계와 핵 비확산 협력을 고려해 에너지부에 제출한 체코 원전 입찰 관련 정보를 에너지부가 반려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점도 예상치 못한 악재였다. 이후 한미 간 협력의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정용훈 KAIST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우리 기업의 승산이 충분했던 만큼 소송이 끝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면서도 “한수원 입장에서는 소송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깝고 갈수록 커지는 논란이 버거웠을 수 있다”고 봤다.
어차피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진 만큼 디테일 싸움에 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2009년 한수원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했던 기술자문료 수준과 비교해 최소한 한수원의 독자 기술력을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은 1971년 11월 고리 원전 1호기를 착공한 후 지난 42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원전을 지어왔다. 반면 명성에 비해 원전 건설 능력이 떨어지는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과 역할 분담에 목말라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한수원이 지나친 저자세로 협상에 임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이다.
구체적인 양 사 간 협력 모델은 내년 3월 결정되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공급사 선정 전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체코 두코바니에 8조 8000억 원대의 1200㎿ 원전 1기를 짓는 공사에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프랑스 국영 전력공사(EDF)가 입찰에 나선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