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재테크

조단위 투자, 정책금융 지원 절실한데…"中에 사업기회 뺏길 판"

[한전에 짓눌린 産銀]

◆ 배터리까지 퍼진 '나비효과'

SK온, 설비투자 자금조달 시급

산은 한전 적자에 부담 커 소극적

산업 경쟁력 퇴보 우려까지 나와

"단기 리스크 치중" 산은 비판도





SK온은 미국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포드와 튀르키예에 합작공장을 세우려던 계획을 올해 2월 철회했다. 수도 앙카라 인근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2025년부터 많게는 연간 45GWh 규모의 물량을 생산해 유럽의 전기버스·트럭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결국 무산됐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파트너사에서 품질 문제를 우려한 점과 자금 확보가 쉽지 않았던 점 등이 두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사례는 자국을 넘어 해외로 발을 뻗어가는 중국의 광폭 행보와 대조된다. 중국 최대 배터리 업체 CATL이 독일 에르푸르트에 세운 공장은 지난해 말 가동을 시작했다.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1위에 오른 CATL의 첫 해외 공장이다. CATL은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 헝가리 등으로 거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배터리 업계의 한 인사는 “미국이 자국 땅에서 중국을 배척하는 기조가 이어진다면 각국 배터리 업체들은 남은 유럽 시장을 따내기 위해 격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시장을 선점해야 하는데 중국의 막대한 자금력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자금 조달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정책금융기관인 한국산업은행조차 대출을 꺼리고 있다는 점이다. SK온은 지난해 초만 해도 상장 전 유치(프리IPO)로 4조 원을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지난해 말 한국투자프라이빗에쿼티(PE) 등 국내 사모펀드에서 1조 3000억 원을 유치하는 데 그쳤다. 한 해 7조 원 규모의 추가 설비투자 자금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데다 올 들어 경기 침체 폭마저 커져 자금시장이 더 얼어붙은 터라 SK의 고민은 깊다. SK온은 MBK파트너스와 카타르투자청 등으로부터 상반기 내 최대 2조 원을 유치할 계획이지만 투자 조건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SK가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산은을 찾아간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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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산은 입장에서는 SK가 내민 손을 선뜻 잡아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산은은 대외적으로는 SK온의 적자가 지속되고 있는 것과 해외 공장 증설은 국내 고용 증대 효과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지만 자회사인 한국전력공사의 대규모 적자에 따른 재무 부담이 커 대출에 소극적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산은은 한전 지분 33%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한전의 적자는 지분법 평가에 따라 지분율만큼 산은의 손실로 잡힌다. 실제 지난해 한전의 순손실 24조 4199억 원 중 8조 원이 산은의 손실로 잡혔고 한전이 올 1분기에도 5조 원 규모의 적자를 낸 것으로 전망돼 추가 손실이 예고돼 있다.

산은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12월과 올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총 1조 원의 현물을 출자해 산은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0.2%포인트가량 높였다. 하지만 최근 전기료 인상이 무산되고 올해 한전 순손실이 불어나면서 출자 효과가 고스란히 사라지게 됐다. 요금 동결로 예상되는 산은의 BIS 비율은 13.2% 수준에 그쳐 금융 당국이 권고하는 기준치(13%)를 가까스로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당국의 한 인사는 “산은이 쥐고 있는 여타 기업 지분을 정리하는 등 구조 조정을 통해 실제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대출을 할 여력을 만들어주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은이 단기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고 국내 투자 기업 위주로 자금을 지원하는 관행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논의 과정에 밝은 한 인사는 “산은 측에서 SK하이닉스처럼 입지가 확실한 곳에는 대출을 고려할 수 있지만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에 자금을 대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산업의 특성상 개별 설비와 부품을 직접 운송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현지에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으며 해외 진출 시 국내 납품 업체와 공동으로 진출하는 형태라면 국내 기업 전반에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산은 관계자는 “특정 회사와의 논의 내용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자금 조달이 지연될수록 배터리 사업의 성장세가 꺾일 수밖에 없는 만큼 산은 등 정책금융 지원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SK온은 이미 수주해둔 물량에 맞춰 증설 계획을 세웠는데 자금 확보가 지연될수록 납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 업체가 국내 업체의 생산 공백을 메워 몸집을 더 키울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김우보 기자·세종=우영탁 기자·임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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