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행진하던 물가 상승률이 14개월 만에 3%대로 내려오자 정부가 정책 방향을 ‘물가 안정’에서 ‘경기 부양’으로 틀 터닝포인트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하반기 경기 반등 폭이 예상보다 작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 방향 전환의 부담을 한층 덜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불안정한 국제 유가는 물론 다시 오르는 원·달러 환율, 사실상 추가 인상이 예고된 전기요금까지 물가를 자극할 대내외적 요인이 산적해 물가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크다는 반론도 여전하다.
2일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7%(전년 동월 대비)였다. 지난해 2월(3.7%) 이후 14개월 만에 4% 아래로 떨어졌다. 석유류 가격 상승세가 한풀 꺾인 영향이 컸다. 지난달 석유류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16.4% 하락했다. 2020년 5월(-18.7%) 이후 최대 낙폭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해 4월 석유류 가격이 34.4% 폭등한 것에 따른 기저 효과 영향이 주효했다. 채소류 공급이 원활해지며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 폭(1.0%)이 지난달보다 둔화한 효과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경기 부양에 집중할 환경이 예상보다 빠르게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 2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상반기 중 4% 수준의 물가를 보게 되고 하반기에는 3%대를 보게 될 것”이라며 “물가 안정 기조를 확고히 하되 서서히 경기 문제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으로 점점 가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 예상보다 빠르게 물가가 3%대로 내려온 만큼 정책 방점이 경기 부양으로 옮겨질 시기도 당겨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다만 물가를 자극할 불안 요인이 여전하다는 게 변수다. 석유만 해도 전월과 비교해 가격이 1.3% 올랐다. 전월 대비 상승 전환한 것은 지난해 11월 이후 처음이다. 즉 지난해 가격 폭등에 따른 기저 효과를 떼어놓고 보면 석유류 가격이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는 뜻이다. 최근 다시 달러당 1340원 안팎까지 오른 환율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소비자물가에 악영향을 끼친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지수)가 9개월 연속 4%대를 기록하고 있는 점도 우려를 더한다. 고물가가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4월 근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0% 올랐다. 외식과 여행 등 개인 서비스 물가가 6.1% 오른 영향이 컸다. 인건비와 재료비 등 그간 누적된 원가 부담이 물가에 본격 반영되며 외식 물가가 7.6% 올랐다. 따뜻해진 날씨에 여행 수요가 늘어나며 외식 외(外) 개인 서비스 물가는 5.0% 뛰었다. 2003년 11월(5.0%) 이후 최대 폭 상승이다.
여기에 추가 인상될 가능성이 농후한 전기요금이 물가 안정 속도를 더디게 할 수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향후 물가 불안 요인이 남아 있는 만큼 경계심을 잃지 않고 가격 동향을 면밀히 점검하며 관리하겠다”고 전했다.
통화 당국인 한국은행도 물가를 안심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목표인 2%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인 데다 근원물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금융통화위원들 사이에서는 근원물가 흐름을 어떻게 봐야 할지가 주요 화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 수준까지 하락하려면 근원물가도 함께 낮아져야 하는데 경기를 더 악화시키더라도 금리를 올려 대응하는 게 맞는지를 놓고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다만 시장은 소비자물가 둔화 흐름이 뚜렷해지고 경기 둔화 우려도 커진 만큼 이달 25일로 예정된 금통위 회의에서도 기준금리가 동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변수는 2~3일(현지 시간) 열리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한미 금리 차가 역대 최대인 1.75%포인트까지 벌어져 환율 불안이 확대된다면 금통위의 계산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국제 유가나 공공요금 등이 불확실한 만큼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은 아직 작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근원물가는 당분간 소비자물가에 비해 더딘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며 “향후 물가 경로상에는 국제 유가 추이, 국내외 경기 흐름, 공공요금 인상 폭과 시기 등 불확실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