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공포가 여전했던 2021년 11월 미국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CJ ENM이 ‘라라랜드’를 제작한 미국 영화 제작사 엔데버를 인수한다는 뉴스였다. 인수 비용은 1조 원에 조금 못 미치는 9300억 원. CJ그룹의 콘텐츠 기업 인수합병(M&A) 중 최대 규모였다. CJ그룹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작사를 헐값에 사들인 것”이라고 설명했고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석권에 들떠 있던 국내 엔터 업계는 CJ가 세계 콘텐츠 시장을 장악해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찼다. 그러나 사명을 ‘피프스시즌’으로 교체한 엔데버는 CJ ENM 해외 사업의 디딤돌은커녕 오히려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이 최근 사업 확대와 글로벌 공략을 위해 진행했던 해외 엔터사들에 대한 M&A가 눈덩이 손실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손실 누적이 엔터 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피프스시즌은 지난해 692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올 1분기에도 4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상태다. 같은 기간 CJ ENM의 영업손실액이 503억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충격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CJ ENM은 결국 사업 및 인력 구조 효율화에 돌입했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피프스시즌의 중역 8명이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피프스시즌의 부진에 대해 CJ ENM 측은 “작품 딜리버리가 플랫폼과 방송사 사정 등으로 지연되면서 적자를 기록했다”며 “올해 공개할 25개 안팎의 작품 중 1분기에 공개할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작품 공개가 집중돼 있는 하반기에는 매출과 수익이 개선될 것”이라고 전했다.
SLL이 2021년 1338억 원에 인수한 미국의 제작사 윕도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SLL은 지난해 적자로 전환했다. 윕의 작품 라인업 부족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지난해에도 세 편만 방영됐지만 올 1분기에는 상황이 더 안 좋아 한 작품도 내보내지 못했다. 증권가에 따르면 윕의 적자 규모는 지난해 200억 원 수준이며 올해도 흑자로 돌아서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해외 인수 기업의 부진 여파는 웹툰·웹소설 업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2021년 1조 원이 넘는 돈을 주고 타파스와 래디시를 인수했지만 지금까지 받아든 성적표는 침울한 수준이다. 타파스와 래디시가 합병해 출범한 타파스엔터는 지난해에만 2282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그 탓에 올 1분기 카카오의 스토리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5% 줄었다. 그 결과 타파스는 한국 법인을 해산했고 카카오엔터는 스토리 부문의 사업과 인력 구조 재편에 들어갔다. 업계에서는 북미에서 웹툰·웹소설이 국내처럼 콘텐츠 시장의 주류로 떠오르지 못한 만큼 타파스의 실적 개선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카카오엔터 측은 “현지에서 웹툰 시장이 아직 초기인 만큼 투자와 사업 효율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네이버웹툰도 마찬가지다. 2021년 6000억 원을 주고 인수한 북미의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왓패드코퍼레이션의 당기순손실 규모는 2021년 199억 원, 2022년 98억 원이다. 영상화 스튜디오인 왓패드스튜디오의 손실을 포함하면 적자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올 1분기 네이버 콘텐츠 부문이 기록한 752억 원 중 상당 부분도 왓패드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웹툰·웹소설 플랫폼 델리툰을 인수한 키다리스튜디오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키다리스튜디오는 2019년부터 70억 원을 들여 델리툰을 품에 안았지만 결과는 지난해 당기순손실 66억 원이었다. 델리툰의 부진에 키다리스튜디오는 올 1분기 적자 전환했다.
K팝 쪽에서도 해외 M&A가 이어지고 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하이브는 2021년 미국의 레이블 이타카홀딩스를 1조 2000억 원에 인수했고 올해는 QC미디어홀딩스를 3140억 원에 사들였다. 심지어 QC 인수를 위해 3200억 원의 단기 자금까지 차입하기도 했다. 올 1분기 말 기준 하이브의 유동 부채가 1조 2044억 원을 기록했고 총부채도 2조 원을 넘어선 이유다. 지난해 이타카홀딩스는 매출 2152억 원, 당기순손익 561억 원을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하이브가 이타카를 M&A할 당시 ‘고가 인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장부가액의 세 배 이상을 주고 사들인 탓이다. 그럼에도 방시혁 의장은 해외 M&A를 지속해나갈 생각이고 라틴아메리카 쪽 레이블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SM엔터테인먼트 역시 SM 3.0의 과제 중 하나로 해외 레이블 인수를 선정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엔터사들이 인수한 해외 법인들의 실적 부진이 투자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해외 M&A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도 성과가 나올지에 대한 의심이 늘어나고 있다”며 “시장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성과 개선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투자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