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 노동조합이 회사의 기밀인 사업 재편에 대한 정보까지 내놓으라며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 노조는 최근 임금 교섭 과정에서 파업은 물론 상급단체인 한국노총에서 불매 운동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등 극한 투쟁에 나선 상태다. 노조가 법에서 정한 권한을 넘어 경영 정보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22일 의료사업부 경영 현황을 두고 인사그룹부장 등 사측 관계자와 면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최근 삼성전자 의료기기 사업부 내 일부 직원들이 다른 사업부로 재배치되면서 ‘분사 또는 매각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자 사측을 ‘호출’한 것이다. 앞서 전삼노는 지난달 10일에도 같은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측을 불러내 긴급 미팅을 진행한 바 있으며 불과 한 달 만에 비슷한 주제로 경영진을 압박하고 나섰다. 당시 노조 측은 “의료기기 사업부 직원들이 불안해한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사측은 “분사를 검토 중인 바 없다”며 “1분기 의료기기 사업 실적이 우수하고 사업 의지도 강하다. 사실무근의 소문”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럼에도 노조 측은 이 문제를 의료기기 사업부 직원들의 처우 문제와 엮어 쟁점화하려는 모습이다. 전삼노는 22일 서울 강동구 의료기기 사업부 앞에서 사업부 임금 교섭에 대한 규탄 활동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규모 면에서 전삼노에 이어 두 번째인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노조는 아예 ‘의료기기 사업부 특별대책위원회’를 꾸려 직접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조직 개편과 관련해 언제든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는 ‘분사 소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며 사측에 공문을 보내 압박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미 여러 번 ‘분사는 없다’는 입장을 전했고 특별히 상황이 바뀐 게 없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노조의 주장이 내부 불안감을 증폭시켜 사내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상급 단체인 한국노동조합총연맹까지 끌어들여 장외투쟁에 나서고 있는 노조가 사측을 압박하기 위해 근거가 부실한 이슈를 과도하게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근거가 부실하다는 점도 문제지만 대외비인 조직 개편 전략 등을 노조에 먼저 내어 달라는 식의 주장은 지나치게 도를 넘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삼성전자 노조는 임금 협상 결렬 후 해외 노조 행사에서 사측을 비판하고 파업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사측과 대립각을 예리하게 세우고 있다. 전삼노는 9일 베트남 하노이 탕롱오페라호텔에서 열린 국제제조산업노조 행사에 참석해 “회사가 노조를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사측을 규탄했다. 전삼노는 삼성전자 전체 직원의 8% 수준인 9900명이 가입한 사내 최대 노조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사내에서도 “해외까지 나가 회사 망신 주기를 하는 것이냐”며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노조는 삼성전자와 노사협의회가 평균 임금을 4.1% 인상하는 합의안에 서명하자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투쟁에 나섰다. 노조는 글로벌 경기 침체, 깊어지는 반도체 한파 등으로 실적이 급감한 상황에서도 10%대의 연봉 인상률을 주장하다가 6%대 이상 인상으로 요구안을 낮췄다. 재협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파업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는 지난달 21일 사측과의 교섭 결렬을 선언한 뒤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조정을 신청했다. 노사 간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아 중노위가 조정 중지 결정을 내리면서 노조는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는 쟁의권을 확보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최악의 경영 위기를 맞은 상태에서 노조의 이기주의 행태가 점차 과도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95% 급감한 6402억 원에 그쳤다. 2분기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8년 4분기 이후 15년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조사팀장은 “노조가 경영 전략과 같은 민감한 정보까지 요구하며 무기화하는 상황은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며 “가뜩이나 노란봉투법 등 기업의 경영 여건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노조가 기업 경쟁력을 깎아 먹는 활동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