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계열 중환자실에서는 수술 부위 드레싱이 필요한 환자가 많습니다.
수술 후 봉합해놓은 부위에서 분비물이 많이 나와 덮어놓은 거즈가 젖으면 수술 부위가 습해지면서 감염을 일으킬 수 있거든요. 원칙적으로는 전공의가 해야 할 업무지만 기도삽관이나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 상황이 아니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 서울의 상급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근무 중인 간호사 A씨는 "불법인 걸 알지만 법에 명시된 간호사 업무가 아니란 이유로 방치하면 환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며 "그렇게 하나둘 넘어온 (의사 등 다른 의료 직역들의) 업무들이 언제부턴가 간호사가 하는 게 당연시 되어버렸다"고 토로했다. 고질적인 의사 인력 부족으로 늘 바삐 돌아가는 병원에서 환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게 간호사들의 하소연이다. 이 같은 현실은 대한간호협회가 간호법에 대한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진행 중인 준법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대한간호협회가 24일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간호법 관련 준법투쟁 1차 진행 결과'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후 4시 20분부터 23일 오후 4시까지 5일간 불법진료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 내용은 총 1만 2189건이다.
구체적인 불법진료 행위 신고 유형을 살펴보면 검체 채취, 천자 등 검사 관련 사례가 6932건, 처방 및 기록이 6876건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L-튜브(비위관)이나 T-튜브(기관절개관) 교환, 기관 삽관은 2764건이었고, 스테플러(stapler)를 이용한 봉합, 관절강내 주사, 초음파 및 심전도 검사 등 치료 및 처치, 검사 관련 사례도 2112건이나 됐다. 그 밖에도 대리수술, 수술 수가 입력, 수술부위 봉합, 수술보조(스크럽이 아닌 1st, 2nd 어시스트)를 포함한 수술 관련 불법진료 행위 신고가 1703건, 항암제 조제 등 약물관리 행위에 대한 신고가 389건 들어왔다. 전공의(레지던트)부터 임상병리사, 약사 등 다른 의료직역이 해야 할 업무가 간호사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협회가 접수된 내용을 분석한 결과 신고대상 병원 유형은 종합병원이 41.4%(5046건)로 가장 많았고, 상급종합병원이 35.7%(4352건), 전문병원을 포함한 병원급 의료기관이 19%(2316건) 순으로 나타났다. 불법진료 행위를 지시한 주체는 44.2%(4078건)가 교수로 가장 많았고, 전공의(레지던트)가 24.5%(2261건), 간호부 관리자나 의료기관장 등이 19.5%(1799건), 전임의(펠로우)가 11.8%(1089건) 순이었다.
불법진료 행위를 신고한 간호사의 31.7%(2925건)는 불법인지 알면서도 불법진료를 한 이유를 묻는 문항에서 '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라고 답했다. '위력관계' 때문이라는 응답은 28.7%(2648건)였고, 기타(환자를 위해서, 관행적인 업무인 줄 알아서, 피고용인 등) 20.8%(1919건), 고용 위협 18.8%(1735건) 순으로 나타났다.
다만 현재로선 정부 당국이 이러한 불법진료 행위에 대한 조사 및 처벌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 22일 간협이 주도하는 준법투쟁에 대해 "간호사가 수행하는 행위가 진료보조에 해당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간협은 그동안 병원에서 관례적으로 행해졌던 간호사 업무 외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준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간호사 면허증 반납운동과 함께 개인 연차를 활용해 합법적인 수준의 파업도 이어나가겠다고 예고했다.
탁영란 간협 제1부회장은 "간호사가 수행할 경우 불법이 되는 업무 리스트는 복지부가 수행하고 보건의료발전협의체를 통해 숙의된 2021년 '진료지원인력 시범사업' 관련 1차 연구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며 "복지부 주장대로라면 현장에서 진료의 보조 행위를 한 간호사가 개별 상황에 따라 기소 대상이 되고 본인이 직접 법원에 가서 유·무죄를 밝혀야 한다는 의미냐"고 따져 물었다. 현재 복지부의 기조는 시범사업 결과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탁 부회장은 "앞으로 불법진료를 지시받았거나 목격한 데 대해 회원의 익명신고 시 수사기관, 국민권익위원회 등 공적기관을 통한 조치를 적극 검토하겠다"며 회원들을 향해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