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글로벌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을 휩쓸던 국내 배터리 업계가 주춤하고 있다. ESS 화제 사건에 대한 대응이 미숙했던 데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에 밀린 게 가장 컸다.
우리나라의 ESS 설치량도 줄었다. 지난해 설치된 ESS 물량은 0.2GWh에 그쳐 2018년 3.8GWh에 비해 2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국내에서는 ESS 시장이 역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탓에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글로벌 기업을 인수합병(M&A)하고 해외에 공장을 세우는가 하면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술력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2030년 35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장에서 점유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다. 업계는 정부가 ESS 안전 기준 강화와 함께 활성화 대책도 만들어야만 잠식돼 있는 시장을 탈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29일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업계(LG에너지솔루션(373220)·삼성SDI(006400))의 글로벌 ESS 시장 점유율은 2020년 당시 55%로 절반을 넘겼지만 지난해는 14.8%로 줄었다. 2021년 각각 2위와 3위를 기록한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의 시장점유율 순위도 지난해는 4위와 5위로 떨어졌다.
국내 업계의 자리는 닝더스다이(CATL), 비야디(BYD), 이브이에너지(EVE) 등 중국 업체가 차지했다. CATL은 지난해 43%의 점유율로 ESS 시장 1위에 올랐고 BYD(11.5%)와 EVE(7.8%)가 각각 2위와 3위로 뒤를 이었다. 중국 업계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앞세워 저가 공세를 펼친 결과다. LFP 배터리는 국내 업계가 주력하는 NCM(니켈·코발트·망간) 등 삼원계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낮지만 생산 단가가 낮고 안정성이 높다. SNE리서치의 한 관계자는 “2020년까지만 해도 한국 업체의 ESS 시장 점유율은 50% 이상을 기록했지만 지금은 중국 업체가 내세운 LFP 배터리가 북미 시장에서도 대세가 됐다”고 설명했다.
ESS 시장은 신재생에너지의 확대에 힘입어 전기차보다 더 빠른 성장이 전망되고 있다. 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발전 비중이 높아지면 잉여 전력을 저장하는 ESS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차 배터리 시장 규모는 690기가와트시(GWh)로 2021년(392GWh) 대비 76% 성장한 반면 ESS 시장은 같은 기간 44GWh에서 122GWh로 1년 만에 177% 성장했다.
전망도 밝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 기관 블룸버그NEF는 2021년 110억 달러(약 14조 6000억 원) 수준이던 글로벌 ESS 시장이 2030년에는 2620억 달러(약 347조 9000억 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업계도 ESS 관련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반격을 시작했다. LG엔솔은 현재 3조 원을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ESS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생산 규모는 16기가와트시(GWh)다. 이 공장은 2026년부터 LG엔솔이 독자 개발한 ESS용 파우치형 LFP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LG엔솔은 이와 함께 ESS 통합 솔루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지난해 미국의 ESS 시스템 통합(SI) 전문 기업인 NEC에너지솔루션도 인수했다. 세계에서 14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NEC에너지솔루션의 역량을 접목해 ESS 통합 솔루션을 보다 고도화하겠다는 것이 LG엔솔의 계획이다.
전기차 배터리에 집중하던 SK온 역시 ESS 사업에 진출한다. SK온은 분기보고서에서 “미래 성장 동력으로 ESS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며 “미국 지역과 신재생에너지 연계용 ESS에 집중하고 있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차량 충전 사업용, 선박용 ESS 시장도 개척할 것”이라 밝혔다. 또한 ESS 전용 생산 라인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덧붙였다. 삼성SDI는 전지 소재, 공법, 시스템 등을 개선한 신제품을 내세워 ESS 시장에 대응한다. 니켈·코발트·알루미늄(NCA) 양극재를 활용해 에너지 밀도를 기존보다 15% 높인 ESS 전용 셀을 올해 하반기 중 선보일 계획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ESS 시장을 선점해놓고도 관련 시장이 위축된 데는 화제 사건도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영향이 미친 것이 사실”이라면서 “이제는 점유율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