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상장사의 자사주 보유 규제 방안을 검토 중인 가운데 상장사들의 자사주 보유 한도 설정 카드가 급부상해 ‘오버행’(대규모 잠재 매도 물량)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자사주가 편법 활용되는 것을 막으면서 미국·독일처럼 자사주 소각을 적극 유도하자는 취지지만 증시를 크게 흔들 수 있는 악재라는 지적에 힘이 실린다.
11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들이 전체 주식의 10%를 초과해 보유 중인 자사주는 10조 5806억 원(9일 종가 기준)으로 집계됐다. 상장사 2441곳 중 자사주를 10% 초과 보유한 기업은 209곳(8.5%)으로 코스피가 121곳(4.9%), 코스닥 상장사가 88곳(3.6%)이다.
기업 별로 자사주 10% 초과 지분 가치가 가장 큰 곳은 SK다. SK는 자사주 24.59%(1799만 주)를 보유 중으로 10% 초과 물량(14.59%·1067만 주)의 가치는 1조 8481억 원이다. 이어 롯데지주가 10% 초과 지분 (22.5%·2361만 주)의 시가총액이 6824억 원이고 삼성화재(5.9%·6601억 원), KT&G(5.3%·6052억 원), 미래에셋증권(12.4%·5708억 원), 삼성물산(2.6%·5359억 원) 순이다. 대기업 중에서는 금호석유(9.02%·3499억 원)와 두산(8.1%·1411억 원)·LS(4.72%·1315억 원) 등 순으로 자사주 10% 초과 물량이 많았고, 초과 지분 가치가 1000억 원 이상인 곳은 20곳이다.
금융위원회가 5일 주최한 ‘상장법인의 자기주식 제도 개선 세미나’에서는 자사주 보유 한도를 10%로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발제자로 나선 정준혁 서울대 교수는 “강제 소각을 의무화하거나 독일처럼 10% 한도를 두면 경영진의 자사주 남용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 교수는 “강제 소각이나 보유 한도 설정은 시장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증권업계와 상장사들은 세미나 내용이 자사주 규제에 즉각 반영되지는 않더라도 당국이 자사주 보유 한도 설정과 한도 초과 물량에 대한 권리 정지 방식 등을 놓고 검토하면서 여론 추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사주 강제 소각’ 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표심을 고려해 소액주주 권익 개선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은 주주 친화정책의 핵심으로 거론돼왔다. 유통주식 수를 감소시켜 상장사의 주당순이익(EPS)을 높이고 자본금을 줄여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끌어올리기 때문. 특히 자사주를 소각하면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전체 주식이 100주일 때 10주를 보유한 주주의 비중은 10%지만 주식 소각으로 전체 주식이 80주로 줄어들면 10주를 보유한 주주의 비중은 12.5%로 커진다.
일각에서는 자사주 보유 한도 초과 물량을 지닌 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매입에 투입한 현금을 회수하려 시장에 대규모 물량을 쏟아 낼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자사주는 소각하지 않고 시장에 직접 매도하거나 블록딜(대량매매), 교환사채(EB) 발행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실제로 카카오는 2020년 3억달러의 해외 교환사채(EB)를 발행하는 데 자사주를 활용했다. 금양 역시 지난 달 525억 원의 자사주 블록딜을 진행했다. 다만 이는 곧 유통 주식 수 증가로 이어져 주가에는 악재다.
재무 상태가 좋은 대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자사주 소각을 통해 주주 가치 제고에 나서고 있다. 앞서 삼성물산은 5년간 자사주를 전량 분할 소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올 초 현대차(3154억 원), KB금융지주(3000억 원), 메리츠화재(1792억 원), 신한지주(1500억 원), 하나금융(1500억 원), KT(1000억 원), 한국콜마홀딩스(537억 원) 등도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올해 자사주 소각 실적은 5월 중순까지 6건 9667억 원이다.
하지만 중소·중견 기업이 자사주 매입 비용을 소각으로 털기에는 부담이 크다. 일성신약은 자사주 보유량이 47.7%로 상장사 중 가장 많은데 보유 한도가 설정되면 자사주가 대거 매물로 나올 수 있다. 조광피혁(46.5%)과 부국증권(42.7%), 텔코웨어(42%), 신영증권(36.2%), 모아텍(35.7%)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금융투자업계는 기업들에 세제 혜택 등을 주면서 단계적으로 자사주 소각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