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산업을 상징하는 인텔은 1980년대 중반 중요한 고비에 서 있었다. D램의 원조 격이었던 인텔은 일본 기업들의 매서운 추격과 고꾸라지는 메모리반도체 가격 속에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당시 최고경영자(CEO)였던 고든 무어에게 앤디 그로브 부사장은 회사의 주력이었던 D램 사업에서 손을 떼고 새롭게 떠오르던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설이던 고든 무어에게 앤디 그로브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해고되고 이사회가 새 CEO를 영입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고든 무어는 할 수 없다는 듯 답했다. “메모리 사업을 포기하겠지.”
이후 인텔은 회사의 근간이었던 D램을 포기하고 PC용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CEO 자리에 올라 인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후 반도체 산업은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일본을 누르고 메모리반도체 패권을 차지한 삼성전자는 1980년대의 인텔과 비슷한 위기에 놓였다.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폭락하고 한파가 장기화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새로운 먹거리’ 확보는 삼성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이 회장의 취임 후 행보를 보면 이 같은 고민이 짙게 드러난다. 이 회장은 지난 달 12일 회장 취임 후 최장 기간인 22일 간 미국 출장을 가서 다양한 산업계의 거물들과 만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 집중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를 만나 미래차 시대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핵심 신성장 동력으로 낙점한 바이오 사업을 위해 존슨앤드존슨(J&J) 등 글로벌 제약사·바이오 업체 CEO들을 만나는 데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회장 취임 후 약 7개월 간 6차례 해외 출장에 나서면서 4분의 1에 가까운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장고하고 있다.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던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이제 30년을 지나 새로운 비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국내 산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의 새로운 미래 비전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앤디 그로브처럼 이 회장 역시 삼성의 세 번째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성숙한 기업에 더 큰 전성기를 다시 부르고 영속할 기반을 마련하는 건 어쩌면 3대에 걸친 장기간의 과업이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영속성을 갖춘 글로벌 최고 기업을 보유한다는 건 어느 시점에서건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일이다. 응원까진 않더라도 불필요한 규제로 앞길을 막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