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주요국들의 자원 무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야가 논의 중인 ‘경제안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기본법’이 자칫 우리 기업들의 목을 옥죌 것이라는 우려를 사고 있다. 제정안대로 입법화될 경우 기업의 공급망 정보가 공적 기구(공급망안정화위원회)에서 다뤄지게 되는데 야권에서 해당 기구에 노동계 인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해 기업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22일 국회에 따르면 기획재정위원회는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최우선 법안 중 하나로 해당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자국 보호주의 경향이 강화되는 가운데 공급망 교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공급망 관리에 정부도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현재 소재·부품·장비 등 특정 분야를 육성하기 위한 개별법은 있지만 국내 공급망 전반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한 법안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공급망 생태계를 관리하는 해당 법안의 조속한 법제화에 대한 정치권·산업계의 공감대는 확인됐다. 하지만 일부 내용을 두고 자칫 독소 조항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정안의 제11호 ‘공급망 현황 조사’가 대표적이다. 해당 조항은 정부가 정책 수립을 목적으로 기업에 대해 “물자와 원재료의 수급·가격 현황, 수출입 동향, 재고 현황, 국내외 사업자 간 거래 관계, 물류 체계 등에 대해 조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특히 제정안은 세제 및 금융 혜택을 받기 위해 기업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공급망 안정화 선도 사업자’ 이외에 일반 사업자 및 단체에 대해서도 자료 제출 등 동일한 의무를 부과했다.
산업계는 비록 ‘비밀 준수의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사업 기밀에 해당하는 공급망 정보를 외부에 공유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 심화로 글로벌 공급망이 대대적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공급망 정보는 곧 기술 경쟁력이라고 이들은 하소연한다. 더구나 반도체·2차전지 등 첨단산업의 공급망 정보는 생산 규모, 공정 방식 등을 유추할 토대가 돼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방아쇠가 될 수 있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국내의 한 재계 단체 관계자는 “공급 원가, 조달처 등 공급망 현황은 외부에 공유되지 않는 기업 경영 전반의 기밀 사항으로 제품 경쟁력과도 직결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정책에 기본적으로 협조할 테지만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는 제출하지 않도록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부와 국회는 기업들에 대한 정보 요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21년 요소수 사태처럼 국가 통계 체계에 잡히지 않는 원재료 품목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정부가 공급망 안정화 기본 계획 등 정책을 수립하려면 자료 요구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 소속의 한 기재위 핵심 관계자는 “조사를 하지 않고 지원할 수는 없고, 자율성을 갖는 조사가 어디 있느냐”며 “공급망기본법의 기본적 대전제는 기밀 유출 방지”라고 말했다.
이런 우려가 나오자 20일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정부가 공급망안정화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다 신중하게 자료 요구 등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 측에서 위원회에 노동계 인사를 민간위원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기업들의 불안감을 오히려 키우는 꼴이 됐다. 공급망안정화위원회에 민간 인사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기획재정부 등이 반대 입장을 피력하면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한 기재부 관계자는 “현황 조사 내용 등의 보안 유지를 위해 민간 인사의 참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도 “최저임금 등 노동 현안이라면 노동계의 참여를 수긍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들이 공급망을 둘러싼 기업의 우려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의심이 된다”고 꼬집었다.
기재위는 27일 경제재정소위를 열고 공급망기본법에 대한 추가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정책 수립을 위해 기업의 협조가 필요하다면서도 보안 장치 체계를 마련해 기업의 신뢰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준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장은 “정부는 정보 보호 체계를 구체화해 기업들에 보안에 대한 신뢰를 줘야 한다”며 “중요 정보는 블라인드 처리를 통해 내부 공유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