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든 것을 다 버렸다.” 1999년 1월 6일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LG그룹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언한 날이었다. LG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가진 아픔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한마디다.
1979년 대한전선 계열 대한반도체를 인수하고 1989년 금성일렉트론을 설립하며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 LG는 한때 삼성전자와 경쟁을 벌일 정도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1997년에는 구 선대회장이 직접 나서 18조 원 투자 계획을 밝힐 정도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김대중 정부가 주도하는 ‘빅딜’ 여파에 LG는 반도체 사업을 현대전자에 넘겨야 했다. 이후 LG그룹에 반도체는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다른 기운이 감지된다. 그룹 차원에서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역량 강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최전선에는 LG그룹의 AI 싱크탱크인 LG AI연구원이 있다. 연구원은 지난달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퓨리오사AI와 차세대 AI 반도체 및 생성형 AI 관련 공동 연구와 사업화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초거대 AI 모델 구현에 도움이 되는 차세대 AI 반도체 기술 개발 로드맵을 적기에 세우고 빠르게 실현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시기 LG전자도 캐나다 AI 칩 개발사인 텐스토렌트와 반도체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텐스토렌트는 전설적인 칩 설계자로 평가받는 짐 켈러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이끄는 회사다.
LG가 반도체 역량을 강화하는 건 미래 먹거리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LG전자가 주력하는 TV·가전 사업에서는 플랫폼 신사업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AI 반도체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LG전자를 비롯해 LG디스플레이·LG이노텍 등 전자 계열사가 합심해 이끌고 있는 전장사업에서도 자율주행 기술 실현을 위한 AI 반도체 설계 역량이 중요해졌다.
업계에서는 LG가 AI 반도체를 무기 삼아 반도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LG가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한 후에도 LG전자에서는 일부 부서를 중심으로 반도체 설계 명맥을 이어왔다”며 “AI 반도체 사업의 경우 다른 전자 계열사와의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