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우만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일하기 힘듭니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것이죠.”
2016년 2월 3일. 충북 오송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에서 열린 취임식 직후 만난 정기석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은 한림대성심병원장에서 질병관리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연봉이 많이 깎이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7년도 더 된데다 본부 이곳저곳을 걸으며 주고 받은 질문과 답변이라 어구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적인 질문의 취지와 답변의 요지는 이랬다.
사명감·비판 의식·소통이 3가지 키워드…①사명감
그는 당시 사명감으로 일한 직원들이 징계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감사원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부실 대응에 대한 책임을 물어 12명의 질본 직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그 사람들은 상당한 처우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질본에 들어와 사명감을 갖고 갖은 고생을 하며 근무한 사람들”이라며 “메르스 상황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강등, 해임 등의 중징계를 받는 것은 과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사명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였을까. 메르스 사태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던 정 전 본부장은 코로나19 대응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코로나19특별대응단 단장 겸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응과 자문을 이끌기도 했다.
②비판 의식
정 전 본부장은 언제, 어디서든 해야할 말은 한다는 평가다. 메르스 대응 때도, 코로나19 대응 때도 그랬다. 그는 메르스 사태 당시 문제점으로 감염 가능 거리를 2m로 잡은 점, 환자들을 제때 제대로 격리시키지 못한 점 등 크게 2가지를 지적했다. 그는 “환자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도 보통 사람 간 거리는 2m 안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격 유지 거리로 2m를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긴박한 상황에서는 급조를 해서라도 외딴 곳에 가건물을 만들고 수용하는 게 맞지 않았겠냐. 뉴욕은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면 즉각 해당 감염병 전문병원으로 옮겨지는 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나라도 유휴병실이 많은 병원들과 계약을 맺고 읍압 병실을 만들어주는 등의 지원을 계속해나가면서 상황 발생 시 이들 병원이 환자들을 즉각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작년에는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는 백신과 치료제에 관해서는 후진국이라며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체 예산 중 연구개발(R&D) 예산이 20조 원이 넘는데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뒤처진 데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해야 한다고 직언했다.
③소통
그는 평생을 폐렴 환자 치료에 전념해온 호흡기내과 분야의 권위자다.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대한내과학회 회장, 대한결핵및호흡기학회 간행위원장, 한림대의료원장 등을 지냈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에는 표준 치료법이 없었던 ‘바이러스성 폐렴’의 치료지침을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그의 이력을 나열하면 소통과는 거리과 먼 사람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 위원장은 언제나 활발하게 소통한다.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을 맡았을 때는 매주 브리핑을 갖고 모든 종류의 질문을 받았고 전화를 통해 추가 질문도 받았다. 예민한 때(?)조차도 연락을 피하는 법이 없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도 소통에 힘쓴다. 슬리퍼 차림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소탈한 모습이 목격(?)돼 기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재정 위기, 공급자 저항 등 산더미 같이 쌓인 숙제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그를 공단 임원추천위원회의 추천과 복지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지난 10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임명했다. 지난 3월 강도태 전 이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4개월 만에 이뤄진 인사이지만 ‘유력’이 실제 임명으로 이어진 만큼 이변은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엔데믹으로의 전환으로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 직에서 물러날 무렵 만나자는 몇몇 기자들의 요청에 조만간 공식 석상에서 만날 수도 있음을 암시했던 그였다.
현재 건보공단에는 과연 임기 3년 동안 풀어내기 벅찰 만큼의 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이다. 우선 저출산 고령화로 재정 악화가 우려된다. 지출 구조 조정이 불가피해 가입자는 물론 공급자의 저항에도 맞닥드릴 수 있다. 기금화 등을 통해 외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정 누수를 막는 동시에 소득 중심의 보험료 부과 체계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필수 의료 보장성 강화를 요구하는 요구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공급자인 의사 출신인 그가 공단 수장이 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일각의 지적도 제기된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정 신임 이사장이 당면한 현안들을 잘 풀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료 전문지식과 행정 경험을 갖춘 신임 이사장이 건강보험 재정 관리 및 필수 의료 중심의 건강보험 보장 강화 등 공단 현안 과제들을 차질 없이 수행하고 공단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①사명감으로 목표 달성을
10일 임명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11일 공식 취임을 준비하고 있는 그였지만 역시 전화를 받았다. 충북 오송에 이어 이번에는 강원도 원주로 가게 된 그다. 일성은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 사명감(使命感)에서 비롯된 듯한 말이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건보,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정 신임 이사장은 공단 운영 방침을 묻는 질문에 “건보가 계속 자체적으로는 적자를 이어오고 있다”며 “자립이 가능한 건보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라고 답했다.
필수 의료 강화에도 힘을 쏟을 방침임을 밝혔다. 그는 “중요한 필수 의료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공단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하는 게 필요할 것”이라며 “일반 의료야 민간인들이 알아서 하는데 필수 의료는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을 해야 유지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정 신임 이사장은 “목표는 국민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건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내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취약점 등을 그래도 파악하고 있으니 정부와 힘을 모아 관련자들과 논의해가면서 하나둘씩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공단 내외부 문제에 대해선 ②비판 의식 필요
재정 관리를 위해서는 그가 비판 의식도 견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할 말은 하는 그이지만 아직은 복지부·건강보험심사평가원 업무와 관련해서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공급자들의 진료가 적정 진료인가라는 점도 따져봐야 되는데 사실 그 부분은 심평원 업무라 내가 나서서 할 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법정 기준인 20%에 미치지 못하는 국고 지원율, 건보료 인상 등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단정지어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답변했다. 국민건강보험법 등에 따르면 국가는 보험료 예상수입액의 20%를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정부 지원액 비율은 14.4%에 그친다. 복지부는 현 시점에서의 보험료 인상 논의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지난해 한 직원의 46억 원 횡령 사건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이다. 업무 개선 및 경영 혁신을 위해서는 비판 의식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가입자, 공급자, 공단 노조와 ③소통을
매년 공급자와 수가 협상을 하는 공단의 수장으로서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적지 않은 이가 과연 공급자인 의사 출신이 공단 이사장을 맡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역으로 의사이기 때문에 보다 원활한 소통이 기대되기도 한다. 노조와의 소통도 급선무다. 당장 공단 노조는 정 신임 이사장에게 △불평등 양극화·저출산 고령화 사회, 포스트 코로나 사회 환경적 변화에 따른 건보 제도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철학과 소신 △현 건보 정책에 대한 소신과 입장 △정부 지원 확대 및 개인정보 개방 관련 데이터 3법에 대한 보험재정 안정화 및 공단 역할 △감염병 관련 비용을 건보 재정에서 지출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견해 △국가의 감염병 전문가로 책임 있는 자리를 두루 거친 이사장 후보자로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공급자들의 부당청구 사례에 대한 조치와 대책 방안 등을 공개적으로 질의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