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채수근 해병 순직 사고 조사 결과를 놓고 ‘외압’과 ‘항명’ 논란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특히 해당 사건을 맡았다가 집단항명수괴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운데 이번 사안을 둘러싸고 박 전 단장을 옹호하는 측과 국방부를 지지하는 측 사이에 진실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14일 해병대 역대 사령관들과 해병 전우회는 ‘최근 해병대 순직 장병 수사 관련 입장문’을 내놓고 “공명정대하고 외부 개입이 없이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군이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군 장병이 희생된 사고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거나 우리 군과 해병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저버리는 결과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며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히 진행되도록 수사 여건을 보장하고 일체의 외부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해병대 역대 사령관들과 전우회는 외부 개입, 외부 간섭이 없어야 함을 두 차례나 언급함으로써 해병대 수사단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군인권센터도 해병대 수사단에 힘을 실어줬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집단항명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인권침해를 겪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경찰에 이첩한 범죄인지 통보를 회수하라고 한 명령 철회 △집단항명수괴죄 수사 중단 △해병대 수사단장 보직해임 취소 △방송 출연 등 관련 징계위원회 회부 철회 등을 권고해달라고 인권위에 요청했다.
또 군인권센터는 긴급구제 조치도 신청했다. 진정 사건 결론이 날 때까지 집단항명수괴 혐의 수사와 징계 심의를 중단하는 등 조치해달라는 것이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국방부와 해병대의 조치는 집단 린치에 가깝다”며 “권리 침해가 즉시 시정되지 않는다면 군 사법·수사 제도를 악용해 군대 안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은폐 또는 조작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전례가 만들어질 것”고 이라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지난 9일 채 상병 사망 사건을 국방부 아닌 경찰이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항명 입장을 지지하는 측은 법적 카드 압박으로 맞섰다.
김영수 국방권익연구소장은 13일에 채 상병 사건을 조사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군 검찰에 고발했다.
김 소장은 “수사단장은 오로지 헌신적인 사명감으로 법과 양심에 따라 철저하게 수사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임의적으로 본 사건을 수사하고 심지어는 수사 결과까지 도출해 외부로 공개하는 어이없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라며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결과는 법률적으로 무효”라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지난 2009년 해군에서 군수 업무를 맡다 영관급으로는 최초로 군납 비리를 내부 고발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계룡대 근무지원단 관련자 31명이 입건됐다. 이후 그는 군을 나와 국민권익위원회에서 국방 분야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국방권익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방권익연구소 측은 고발 취지에 대해 “해병대 수사단 측의 위법행위에도 불구하고 군인권단체 등 시민단체나 국가인권위원회 및 국회나 언론 등에서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해병대 수사단장의 직권남용 행위가 마치 정의로운 행동이었던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며 “이러한 현실에 동의할 수 없어 고발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밝혔다.
법조계 일각에서도 법률전문가가 아닌 수사전문가들의 미숙한 법 적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전 수사단장이 초급 간부부터 사단장까지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를 적용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도한 법 적용 아니냐는 의견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채 상병 사망과 관련해 얼마나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있었는지가 업무상 과실치사 적용이 적절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핵심 요소라고 말한다. 한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는 “수색이 위험하다는 보고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이 이를 누락시켰다거나 ‘한시가 급하니 안전 조치를 생략하고 수색하라’고 지시했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물증이 나와야 사단장의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또 “군사법원법 개정 취지에 비쳐보면 해병대 수사단에서 각종 혐의를 확정된 것처럼 적용해 이첩하는 것은 법 개정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며 “객관적인 사실관계만 정리해 경찰에 넘기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검찰 경력 20년이 넘은 한 법조인은 “업무상 과실치사 적용은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확인돼야 한다”며 “사단장 등 지휘부가 책임진다면 초급 간부는 제외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8명이나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 것은 아무리 봐도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외압과 항명 측으로 나눠져 논란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법률적 방어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 전 수사단장은 이날 ‘군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신청했다.
박 대령의 법률대리인인 김경호 변호사는 “박 수사단장이 언급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제3의 기관은 바로 군검찰수사심의위원회”라며 “국방부검찰단에 14일부로 이 위원회의 소집을 정식으로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고 이예람 공군 중사 사망사건 이후 군검찰의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제정됐으며,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의 경우 군검찰 수사의 절차와 결과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설치되는 기구다.
심의위원회는 5명 이상 20명 이하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수사 계속 여부와 공소 제기 또는 불기소 처분 여부, 구속영장 청구 및 재청구 여부 등을 심의한다.
김 변호사는 또 “많은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고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이라며 “수사 계속 여부와 공소제기 또는 불기소 처분 여부에 대해 국방부 검찰단이 아닌 이 위원회에서 진행해야 할 필요성과 상당성이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앞서 박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거부했다. 박 전 수사단장은 군 검찰단 출석이 예정됐던 지난 11일 오전 입장을 배포하고 “국방부 검찰단은 적법하게 경찰에 이첩된 사건서류를 불법적으로 회수했고, 수사의 외압을 행사하고 부당한 지시를 한 국방부 예하조직으로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없다”며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명백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해병대사령부는 박 전 수사단장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해병대사령부는 16일 오후 2시 사령부 부사령관실에서 열리는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라고 지난 12일 박 대령에게 통보했다. 해병대사령부는 박 대령이 지난 11일 국방부 검찰단 수사를 거부한 직후 KBS 1TV 시사 프로그램 '사사건건'과 '뉴스9' 등에 출연한 것을 문제 삼았다. 군인은 사전 승인을 받지 않고 언론 인터뷰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해병대 공보정훈업무 규정과 군사보안업무 훈령을 근거로 든 것으로 전해졌다.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의식해서 인지 입장표명이 없던 대통령실도 지난 13일 해병대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와 관련한 대통령실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번 논란과 관련, 오는 26일 열리는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현안질의에서 여야간 대립도 치열할 것으로 보여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먼저 공세에 고삐를 죄였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이 이날 고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의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특검과 국회 청문회 개최를 제안했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상병이 순직한지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수사기관의 수사는 아직 시작도 못 했다”며 “증거 인멸의 우려가 커지고 국민 의혹과 공분도 커지고 있어 특검으로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