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의 뇌파 측정 기기(뇌파계)를 활용한 진료가 적법하다는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계기로 의사와 한의사 간 직역 갈등이 가열되는 양상이다.
치매 관련 의료진 2000여 명이 소속되어 있는 학술단체인 대한치매학회는 23일 성명을 내고 "뇌파 측정기기를 치매와 파킨슨병 진단에 활용한 한의사의 진료가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에 강한 우려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학회에 따르면 치매는 뇌세포가 파괴되면서 기억력 등의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해 뇌졸중에 의한 혈관성 치매, 파킨슨병 등 100여 가지가 넘는 원인 질환에 의해 발생한다. 치매를 잘 관리하려면 이러한 원인 질환을 제대로 감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번 판결에서 지목된 뇌파검사의 경우 진단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회는 "치매 진단은 인지 기능을 파악하는 인지 기능 검사와 뇌 상태를 파악하는 뇌 영상 검사가 필수적"이라며 "뇌파검사는 치매 환자의 진단 과정에서 인지 기능 변화를 일으키는 뇌전증이나 뇌파에 이상이 나타나는 자가면역 뇌염, 크로이츠펠트야콥병, 대사성 뇌병증 등을 감별하기 위해 활용될 뿐 치매 진단을 위한 필수검사 항목에 포함돼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학회에 따르면 뇌파계는 단순히 검사 시행 뿐 아니라 정확한 판독이 중요하기 때문에 전공의(레지던트) 수련 기간동안 관련 교육을 충분히 실시하고 있으며, 의료현장에서는 해당 전문과목 전문의들만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의료 현장에서 뇌파 검사 오남용과 치매 진료의 전문성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고 꼬집었다. 환자 안전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학회는 "이번 판결로 불거진 사안들은 단순히 의사와 한의사간의 직역 다툼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면서 "의료기기 사용과 치매 진단 및 치료에서 의학적 근거에 기반한 지침 준수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돼야 하고, 의료기기가 어떻게 사용돼야 환자에게 안전하고 유용한지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지난해 12월 ‘초음파’에 이어 이번 ‘뇌파계’마저 한의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의사단체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앞서 대한의사협회는 대법원 판결 당일(18일) 입장문을 내고 "현행 의료법이 의료와 한방의료를 이원화해 규정하고 있음에도 대법원이 이 같은 의료법 규정에 반해 한의사가 의과 의료기기인 뇌파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다"며 경악과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각 의료 직역의 축적된 전문성과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면허의 경계를 파괴해 버리는 내용의 판결을 내리면서 의료법상 의료인 면허제도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의협은 "무면허 의료행위가 만연해지면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하게 될 것임이 불 보듯 자명하다"며 "한의사들이 이번 판결의 의미를 오판해 의과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등 한의사 면허 범위를 넘어서는 의료행위를 시도한다면 이를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줄 수 있는 불법적인 무면허 의료행위로 간주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총력 대응해 나가겠다"고 엄포를 놨다.
오는 24일 한의사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 관련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신경전이 팽팽한 가운데 대한한의사협회는 해묵은 명칭 논쟁까지 들고 나왔다. 의료법상 의사 뿐 아니라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간호사가 의료인으로 규정되어 있는 만큼 의사들만 의료계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의협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양의계를 의료계로 표현하는 명백한 오류는 바로 잡아야 한다"며 "아무도 대한축구협회나 대한스키협회를 '스포츠계'라고 부르지 않는다. 양의사들만을 지칭할 때 의료계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든 의료인을 포괄하는 용어 사용으로 잘못된 표현으로 '(양)의계' 등의 용어가 적절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앞서 '한방사'와 '양방사'라는 명칭을 놓고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한편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는 오는 24일 오전 10시 초음파 기기를 이용해 진료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의사 A씨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을 진행한다. A씨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부인과 증상을 호소하는 여성 환자에게 68회에 걸쳐 초음파 진단기기를 사용해 환자의 신체 내부를 촬영했지만 자궁내막암 발병 사실을 제때 진단하지 못했다. 당초 1심과 2심에서 벌금 80만 원 형의 유죄를 선고 받았으나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원심을 파기하고 A씨에 대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시대가 바뀌면서 한의사의 진단용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새로운 판단기준이 필요하며,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이 통상적으로 보건위생상 큰 위해가 없다는 게 대법원의 논리다. 이후 올해 6월까지 3차례 파기 환송 공판이 진행됐는데, 재판부는 최종 선고를 이틀 앞둔 22일 변론을 다시 진행하기로 결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