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하루] ‘순망치한’의 한중관계 (1)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역사적으로 한중 관계를 표현하는 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종종 거론되고는 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춘추좌씨전’의 표현처럼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얽혀 있는 운명 공동체를 말한다. 이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서 서로의 안보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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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입술과 치아’의 관계라는 표현이 사용돼 보편화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고려 시대는 아주 드물게 사용됐고 청나라가 등장한 조선 후기에는 빈번하게 사용되므로 중국에 명나라가 존재하던 조선 전기에 그 계기가 마련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위치가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고 늘 일부라도 국경을 접한 인접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기에 이러한 인식과 표현이 확산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명의 276년(1368∼1644년) 가운데 어떤 사건이 ‘순망치한’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을까.

잘 알려진 계기는 임진왜란이다.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조선이 일본에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명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 전쟁의 추세를 수세에서 우세 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다면 1592년 5월 2일 한양이 일본군에 함락된 때부터 ‘순망치한’의 관계가 마련된 것으로 봐도 좋을까. 분명 임진왜란과 명군의 파병은 ‘순망치한’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이보다 171년 전인 1421년 양국이 ‘순망치한’의 관계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그것은 명의 수도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으로 이를 기념해 1421년 정월 초하루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천도를 기념하는 조하(朝賀) 의식이 거행됐다. 다시 171년 뒤인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에 파병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조선이 단지 ‘인접국’이거나 모범적인 ‘조공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수도 베이징과 가장 인접해서였다. 명의 수도가 전기처럼 난징이라면 파병이 이뤄지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베이징의 취약한 물류 체계에 숨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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