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고차 시장은 대표적인 ‘레몬마켓(저급품 유통시장)’으로 불린다. 지난해 기준 중고차 거래량은 연간 270만대로 신차보다 100만대 이상 많고, 시장 규모도 40조원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시장이지만 소비자의 신뢰도는 높지 않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보 비대칭이 심해 속된 말로 ‘눈탱이 맞기 쉽다'는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추석 연휴가 끝난 10월부터 중고차 시장이 확 달라질 전망이다. 현대차(005380)그룹이 중고차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이 공식적으로 중고차 사업과 관련해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한 적은 없다. 올 초 신년회에서 장재훈 현대차 사장이 “인증 중고차 사업으로 신뢰도 높은 중고차를 제공할 것”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 전부다.
다만 현대차그룹의 중고차 사업 개시 시점이 다가오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준비 작업들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시장에 알려진 내용들을 중심으로 현대차그룹의 중고차 사업을 재구성해봤다.
김 과장, 박 부장 몰던 ‘신차급’ 중고차 쏟아진다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다. ‘양질의 차’를 믿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차 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오랜 기간 누적되다보니 돈을 더 주더라도, 제 값을 하는 차를 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차그룹이 판매할 중고차는 소비자들의 변화된 취향을 제대로 저격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대차그룹이 정부 권고에 따라 초기엔 ‘출고기간 5년 이내, 주행거리 10만km 이하’의 자사 브랜드 중고차 중 품질 검사를 통과한 차량만 판매할 계획이어서다.
중고차 사업은 양질의 차량을 매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현대차그룹은 이 점에서 기존 중고차 매매 상사들보다 앞서 있다. 임직원들이 갖고 있는 ‘A급 신차’, 다시 말해 현대차그룹의 인증을 달고 판매될 잠재적인 양질의 중고차 물량이 많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차장급 이상 임직원들에게 2년 마다 신차의 30%를 할인해준다. 대리·과장의 할인율은 이보다 적다. 현재는 임원 이하 직급은 매니저와 책임 매니저로 단순화됐지만 입사후 15년차 정도되면 차장급 지위가 된다. 자동차 기업에 다니는 직원의 특권이자 직원들을 위한 복지 제도인 셈이다. 이 때문에 회사 내부에선 ‘차테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신차를 30% 할인받아 산 후 2년 정도 타다가 중고차로 팔고, 다시 30% 할인을 받아 신차를 사는 것이다. 중고차로 팔 때 손해보질 않으려면 감가상각율이 신차 할인율을 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현대차그룹 직원들이 타는 차량은 깨끗하고 관리가 잘 돼 있는 편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직원들은 기존 차를 처분할 때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헤이딜러’나 중고차 경매사업을 하는 계열사 현대글로비스에 파는 경우가 많았다”며 “현대차그룹이 중고차 사업을 시작하면 아무래도 직원들이 타던 ‘A급 중고차’들의 상당수가 이쪽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임직원 ‘내차팔기 서비스’…용인엔 상품화 센터 오픈 임박
중고차 사업 개시를 앞두고 현대차그룹은 지난 11일부터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내차팔기'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전용몰에 접속해 방문 평가 신청을 하면, 전문평가사가 방문해 차량을 평가하고 현대차 자체 개발 가격 산정 엔진으로 차량 견적을 내는 방식이다. 현대차그룹은 중고차 사업을 시작하면 소비자에게 당분간 온라인을 통해서만 판매할 계획인데 내차 팔기 서비스는 양질의 중고차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다. 현대차그룹은 중고 온라인 플랫폼도 개발 중인데 직원 대상으로 내차 팔기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그룹은 경기도 용인 오토허브와 경남 양산에 중고차 상품화 센터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은 현대차그룹이 매입한 중고차를 보관하고, 차량의 상품성을 높이는 기지로 활용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이 중고차를 온라인으로만 팔 가능성이 높아 온라인 플랫폼(모바일 앱)에서 소비자와 계약이 이뤄지면 이곳에서 차량이 출하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중고차 매매상들이 입점해 있는 용인 오토허브의 B동 지하 4층를 가보면 ‘현대 서티파이드(현대차 인증)’, ‘기아(000270) 인증 중고차’라고 적힌 팻말 아래 출시 1~2년 된 A급 중고차들이 빼곡히 주차돼 있다. 시승차로 쓰였던 차량부터, 직원들로부터 매입한 차량, 현대캐피탈이 취급하던 법인용 렌터카 차량까지 즐비해 있다. 미세한 하자가 있어 수리를 요한다는 메모지가 붙어 있는 차량들도 있다.
현대차는 양산시에도 용인과 같은 상품화센터를 연다. 현대차는 1996년부터 운영해온 2만9700㎡ 규모의 양산출고센터를 지난해 6월 종료하고, 해당 부지에 전시장과 정비공장을 갖춘 인증중고차센터를 구축했다. 10월 용인 인증중고차센터와 같이 문을 열 예정이다.
중고차 시장, 대기업 주도의 시장과 저가형 시장으로 양분될 수도
현대차그룹이 진출하면서 중고차 시장은 격변기를 맞을 전망이다. 중고차 매매업은 그동안 ‘생계형 업종’으로 지정돼 대기업의 진출이 제한돼 왔다. 2019년 이 제한이 풀렸고 현대차그룹은 이듬해 시장 진출을 공식화 했다. 하지만 기존 중고차 업계의 반발과 이를 수용한 정부의 제동으로 2년 넘게 표류해왔다.
10월부터 중고차사업이 개시되면 중고차 시장은 현대차그룹이 주도할 ‘5년 이내, 10만km 미만 시장’과 그 외 시장으로 양분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그룹이 ‘신차급 중고차’의 판매 가격대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변수지만, 기존의 중소형 중고차 매매상사들은 5년 이상 저가형 중고차나 수입 중고차 쪽에서 승부를 봐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이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면서 상생협력을 강화하기로 한만큼 기존 중고차 매매상들과 공존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현대차는 정부의 권고에 따라 현대차는 시장 점유율을 내년 4월까지 2.9% 이내로 유지하고, 2025년 4월까지 4.1%를 넘지 않기로 했다. 기아도 같은 기간 2.1%, 2.9% 수준을 유지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인증중고차 대상 이외의 물량은 기존 중고차 매매업계에 전량 공급한다. 중고차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교육 지원도 나설 방침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현대차그룹이 양질의 제품 공급과 소비자 신뢰를 앞세워 시장을 장악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말 기준 39조원 수준인 중고차 시장이 2025년 50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현대차그룹의 중고차 시장 진출로 중고차 판매 단가가 상승하고, 거래가 활성화될 경우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품질을 바탕으로 고가 전략을 펴 신차 시장에서 실적을 크게 개선한 경험이 있는 현대차그룹이 중고차 시장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펼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의 시장 진출로 국내 중고차 시장의 판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