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는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의열 활동을 이끈 이종암·이강훈·엄순봉 선생을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1896년생 이종암 선생은 대구광역시 출생으로 1918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속성 과정을 거쳤고 1919년 11월 동창생들과 의열단을 창립했다. 의열단은 항일무력 독립운동단체로 1920년대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을 전개했다.
선생은 1925년 비밀리에 귀국해 경북 달성군에 은신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살인미수 등 혐의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5월 숨을 거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03년생인 이강훈 선생은 1925년 신민부(1925년 북만주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군사위원장 김좌진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귀국, 함경도를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1931년 12월 중국인·일본인 무정부주의자들이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합작해 창립한 ‘항일구국연맹’의 결성에 참여했다.
1933년 선생은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도모했으나 체포됐고 일본영사관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는다. 일본 도쿄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조국 광복으로 출소했다.
정부는 이강훈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06년생인 엄순봉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본영사관 밀정 이종홍을 처단하고 독립운동에 방해물이 되는 옥관빈을 사살했고 1935년에는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했다.
이후 일본영사관 경찰로 넘겨져 모진 고문을 받았고 종로경찰서로 압송돼 취조를 받은 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돼 3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헌신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