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 ‘순망치한’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계기가 임진왜란과 명군의 파병에 있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명이 조선에 파병한 결정적 이유는 조선이 ‘인접국’이거나 모범적인 ‘조공국’이어서가 아니라 북경의 취약한 물류 체계에 있음을 지적했다.
당시 인구 100만을 넘어선 메가시티 북경은 경제적으로 비자족적 도시였다.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먹거리인 조량(漕糧)은 대부분 남쪽의 부유한 강남(江南) 지역에서 대운하를 통해 조달됐다. 문제는 조량의 운송로가 대운하 하나였다는 데 있었다. 대안 루트가 없었다. 아니 기존에 있던 해운 루트를 의도적으로 단절시켰다. 이것이 북경에 대한 취약한 물류 체계의 발단이다. 운하가 단절되는 순간 북경의 백만 백성들은 굶주림과 패닉에 빠졌다. 단 일 년의 단절도 용납할 수 없는 취약한 구조를 1415년 이래 임진왜란까지 180년 가까이 유지한 것이다.
발단은 1415년 5월 29일(음력, 양력으로는 7월 5일) 발생했다. 당시 수도로의 조량 운송을 책임지던 진선(陳瑄)은 대운하의 주요 구간인 청강포(淸江浦)에 대한 공정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황제인 영락제에게 올렸다. 청강포 공정 완료를 통해 항주(杭州)와 북경을 이어주는 근 1800㎞의 대운하 유통망이 본격 가동됐다. 그런데 영락제는 이와 동시에 해운을 통한 조량 운송을 중단시켰다.
이후로 대운하는 수도 북경을 먹여 살리는 ‘목구멍’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 명 조정이 근심했던 핵심은 조선이 일본에 점령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이 수도 북경의 목구멍인 대운하를 단절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던 점을 우려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이 간헐적으로 대운하를 공략할 경우 1년도 되지 않아 수도 북경이 곤경에 처할 것임을 명의 관료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둬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한 것이다. 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순망치한’이라는 관계 인식도 이때부터 확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