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되면서 중국이 주도권을 쥔 핵심 광물 자원의 수출을 제한하며 ‘자원 무기화’에 나서고 있다. 20일 중국이 2차전지 핵심 원료인 구상흑연 등 고(高)민감성 흑연을 수출 통제 대상에 넣기로 한 것 역시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첨단 반도체,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하자 이뤄진 조치다. 문제는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타격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 업계는 공급망 다변화로 중국발 리스크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지만 아직 중국을 대신할 수입처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여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날 중국 상무부와 해관총서(세관)가 발표한 ‘흑연 품목의 임시 수출 통제 조치 최적화 및 조정에 관한 공고’에 따르면 12월 1일부터 중국의 수출 통제 리스트에 오르는 흑연 품목은 주로 2차전지 등 미래 산업의 핵심 분야에 쓰이는 품목들이다. 철강·야금·화학공업 등 국민경제 기초산업에 주로 쓰이는 용광로용 탄소전극 등 5종의 저민감성 흑연 품목은 수출 통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흑연 품목에 대한 수출 통제를 두고 국가 안보와 이익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를 두고 “많은 외국 정부가 중국 기업의 산업 관행에 대해 압력을 가하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수출 허가를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U는 보조금 혜택을 부당하게 누리고 있다며 최근 중국산 전기차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17일(현지 시간) 엔비디아가 만든 저사양 인공지능(AI) 칩의 판매를 중단하도록 하는 등 중국 기업의 반도체 접근 제한을 확대했다.
중국 상무부는 대외적으로는 “어떤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이번 조치가 미국·EU 등에 대응한 조치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중국은 앞서 미국의 첨단 반도체 기술 제재에 맞서 8월 1일부터 차세대 반도체 원료인 갈륨과 게르마늄을 허가 없이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이 다시 중국 첨단 반도체와 양자컴퓨팅·AI 등 3개 분야에 대한 미국 자본의 투자를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자 중국은 다시 흑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중국은 세계 최대 흑연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전 세계 흑연의 90% 이상을 정제해 거의 모든 전기차 배터리 음극재에 흑연이 쓰인다. 로이터는 “중국 세관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 흑연의 최대 구매자는 일본·미국·인도·한국이 포함된다”고 밝혔다.
중국과 경쟁하는 K배터리 업체들의 영향도 우려된다. 중국산 의존도가 높은 만큼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국내 배터리 업계에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보유 중인 흑연 재고 물량이 남아 있어 단기적으로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통제 조치가 지속되면 배터리 생산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중국 기업이 흑연을 수출하려면 중국 상무부에 신청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 만큼 조달 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배터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를 통해 수출이 허가되더라도 수출 심사가 복잡해지는 만큼 기존보다 흑연의 조달 절차가 약 2~3주는 더 소요될 것”이라며 “현재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의 흑연 재고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공장 가동에 차질을 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본격적으로 통제가 시행될 경우 규제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정부도 긴급 대책 회의에 나섰다. 익명의 한 전문가는 “중국이 수출을 완전 금지하는 것은 아니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라 영향을 예단하기 힘들다”면서도 “흑연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대체선을 기업들과 강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인조흑연의 87%, 천연흑연의 72%를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 인조흑연의 중국 의존도는 90%대 초반까지 높아진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