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저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첫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였던 김종훈 전 미국 벨연구소 소장은 2013년 3월 4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인사청문회에 서기도 전에 낙마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 정치권과 관료 사회의 변화에 저항한 세력들이 국적 문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 부족 가능성을 이유로 장관 임명을 반대했다”며 자신의 순진함을 탓했다. 서울 출생의 미국인인 그는 1992년 정보기술(IT) 기업인 유리시스템즈를 창업, 1998년 루슨트테크놀로지에 11억 달러에 매각한 뒤 벨연구소 소장과 알카텔루슨트의 최고전략책임자(CSO)를 역임했다. 수년 전에는 초대용량 온디맨드 방송시스템 스타트업(Kiswe)을 창업했고 삼성전자 사외이사도 맡고 있다.
새삼 10년 전의 일을 꺼낸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또는 12월 초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후임을 지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관가에서 흘러 나오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글로벌 인사를 영입해 혁신 생태계를 일궜으면 해서다. 내년 4·10 총선에 출사표를 던질 수도 있는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후임 자리도 마찬가지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박진 외교부, 한동훈 법무부, 원희룡 국토교통부, 조승환 해양수산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출마를 위해 법정 시한(내년 1월 11일) 전에 사퇴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굳이 두 부처 장관을 콕 집어 거론하는 것은 미래 성장 동력에 노란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기업에 지원하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두 자릿수나 줄여 편성했다.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지원도 축소해 혁신 동력 창출에 일정 부분 브레이크가 걸린 양상이다. 가뜩이나 올해 우리 경제성장률이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보다 낮아진 상황에서 과학기술과 벤처·스타트업 생태계의 활력마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계는 R&D 예산 삭감과 관련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이 우려된다(박태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책부원장)”는 목소리가 무성하다. “R&D다운 R&D를 위해 방만하게 운영되는 R&D 예산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실과 당정의 입장이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 과기정통부·중소벤처부 장관만큼은 글로벌 경험과 네트워크가 풍부한 인재를 유치했으면 한다. 과기정통부 장관의 경우 2019년 9월부터 최기영·임혜숙 장관을 거쳐 현 이 장관까지 학계 출신이 맡고 있는데 과학기술계의 평가가 그리 후하지는 않다. 김 전 소장 외에도 지영석 엘스비어 회장(과기·교육 전문가), 김정상 미국 듀크대 교수 겸 아이온큐 최고기술책임자(CTO), 김영기 미국 시카코대 교수 겸 차기 미국 물리학회장, 조남준 난양공대 석학교수 겸 산업 플래그십 프로그램 처장 등 찾아보면 국내 사정에 밝은 해외 인재도 많다. 유럽과 싱가포르 등에서는 대통령·총리 산하 글로벌자문위원회와 특보 제도를 활성화해 과학기술의 첨단화를 지양한다. 270여만 명의 우리 국적자를 포함해 약 750만 명의 재외동포 중에 인재를 널리 구할 필요가 있다. 마침 정부가 내년 외국과의 공동 연구 예산(약 1조8000억 원)을 올해보다 3배가량 늘리기로 했고 벤처·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 확대에도 본격 시동을 거는 상황이다. 부처 이기주의 타파와 산학연정 협력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도 아예 새 판을 짤 필요가 있다. 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할 글로벌 인재의 경우 외국 국적이면 복수 국적을 부여하고 기업을 한다면 백지 신탁을 면제해서라도 삼고초려를 통해 메기 효과를 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