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은 전국에 약 5800개의 ‘재활용 분리수거 스테이션’이 갖춰져 있다. 스웨덴 포장재 회사 4곳이 공동 설립한 비영리기업 FTI에서 운영·관리하는 시설이다. 지역 주민 수에 비례해 설치되며 유리·종이·플라스틱·금속 외에도 멸균팩을 위한 수거함이 마련돼 있다. 이는 멸균팩을 포함한 종이팩의 재활용률이 80%에 이르는 비결로 꼽힌다. 한국의 종이팩 재활용률은 2021년 기준 14%에 그친다. 설상가상으로 멸균팩은 곧 ‘공식적인 쓰레기’가 될 예정이다. 환경부가 내년 1월 1일부터 멸균팩에 ‘재활용 어려움’ 마크를 부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멸균팩을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종이팩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이유는 수거 체계가 없어서다. 종이팩은 살균팩(펄프와 합성수지로 만든 우유팩 등)과 멸균팩(펄프·합성수지·알루미늄으로 만든 주스팩 등)으로 나뉜다. 펄프에 다른 소재를 더한 복합 소재라 일반 종이와 같이 재활용할 수 없다. 살균팩과 멸균팩도 각각 재활용해야 한다. 멸균팩에 들어간 알루미늄 때문에 한꺼번에 화장지로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팩류는 애초부터 종이와 별도로 분리배출하거나 선별장에서 따로 골라내야 하지만 국내에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종이팩 수거 사업이나 일부 제로웨이스트숍·생활협동조합의 수거 캠페인 정도가 전부다. 서울환경연합이 최근 조사한 결과 서울 25개구마저 제각각이었다. 14개구는 살균팩·멸균팩을 모두 수거했지만 6개구는 살균팩만 수거했고 나머지 5개구는 종이팩 수거 사업이 아예 없었다. 물론 집 앞 분리수거함에 배출하는 ‘문전 배출’ 방식과 비교하면 근본적으로 수거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분리배출 및 재활용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높아졌는데 시스템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종이팩은 재활용을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자원이다. 살균팩·멸균팩 모두 질 좋은 펄프를 원료로 생산하며 휴지·페이퍼타올, 건축자재(외장재·벽보드·천장보드 등)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생산부터 폐기까지 탄소배출량이 플라스틱의 3분의 1이기 때문에 환경에 덜 유해한 소재로도 환영받는다. 한국멸균팩재활용협회에 따르면 500㎖ 페트병 하나를 종이팩으로 교체하면 55.3gCo2e의 탄소 절감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에 따르면 국내의 종이팩을 100% 재활용할 경우 연간 105억 원을 절감하고 연간 소비량의 33%가 넘는 분량의 화장지를 생산할 수 있다. 특히 멸균팩은 상온 보관이 가능해 플라스틱을 대체할 소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출고된 살균팩 대비 멸균팩의 비율은 2014년 25.3%에서 2021년 42.9%로 크게 늘었다.
이와 관련해 환경부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중으로 관련 업계와 논의 테이블을 마련해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활용 어려움’ 마크를 붙이기로 한 것은 “지난 수년간 생산 기업들이 재활용 시스템을 갖추도록 유예 기간을 줬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은 2014년 25.6%로 2021년(14%)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종이팩 생산 기업들은 현재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적용받아 재활용 부과금을 낼 뿐 실제 수거와 재활용의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자원순환팀 활동가는 “환경부가 종이팩류의 문전 배출 체계를 갖추지 않고 기업에만 재활용률 제고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소한의 체계도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멸균팩에 ‘재활용 어려움’ 마크를 붙임으로써 멀쩡한 자원을 폐기하도록 하는 정책 방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환경부는 종이팩 분리배출함 설치 시범사업을 통해 2022년 하반기 전국적으로 수거함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시행이 지지부진한 상태다.